"프로젝터 1만8000루멘이 고작 140루멘이라고?"…엡손, 中 야버 허위광고 승소가 준 교훈
[디지털데일리 김문기 기자] "18,000루멘의 압도적 밝기로 대화면을 즐기세요!"
아마존이나 국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빔프로젝터를 검색하면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광고 문구다. 하지만 이 숫자가 사실은 소비자의 눈을 가리는 '가짜 스펙(거품)'이라면 어떨까.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6'에서는 프로젝터가 단연 화두였다. 글로벌 가전 기업들이 앞다퉈 AI 기능을 강화한 포터블 프로젝터와 차세대 레이저 프로젝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100인치 이상의 초대형 화면을 TV보다 저렴하게 구축할 수 있고, 캠핑과 차박 등 아웃도어 열풍까지 겹치며 프로젝터 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 18,000루멘이 140루멘으로 추락… 충격적인 '스펙 뻥튀기'의 실체
최근 엡손 아메리카(Epson America)는 중국의 프로젝터 제조사 야버(Yaber)를 상대로 제기한 기만적 허위 광고 소송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뤄냈다고 발표했다. 엡손은 그동안 일부 중국산 저가 브랜드들이 온라인 마켓플레이스를 중심으로 말도 안 되는 수치의 밝기를 내세워 공정 경쟁을 훼손하고 소비자를 속이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이번 소송 합의에 따라 야버는 자사의 주요 프로젝터 모델에 명시됐던 과장된 '백색 밝기(White Brightness)' 사양을 국제표준인 'ISO 루멘(ISO 21118)' 기준으로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합의에 따른 주요 모델의 스펙 변경 내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격차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야버 E1' 모델이다. 당초 1만 8,000루멘이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내세워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던 이 제품은, 국제표준을 엄격히 적용하자 실제 밝기가 고작 140루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존 광고 수치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무려 100배 이상 뻥튀기되어 있었던 셈이다.
다른 주력 모델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1,600루멘의 고도 밝기를 자랑하던 '야버 K3'는 실제 990루멘으로 하향 조정되었고, 700루멘으로 광고하던 '야버 L2s'는 430루멘으로 정정되며 체면을 구겼다. 이 밖에도 800루멘을 내세웠던 '야버 V12'는 정확히 절반 수준인 400루멘으로 떨어졌으며, 450루멘이던 '야버 T2' 역시 290루멘으로 대폭 낮춰 표기하게 됐다.
1만 8,000루멘으로 포장됐던 제품의 실제 국제표준 밝기가 140루멘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소비자들이 얼마나 턱없는 허위 스펙과 과장 광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안시루멘'은 옛말, 'LED 루멘'은 꼼수… "진짜 표준은 ISO 루멘"
그렇다면 왜 이런 터무니없는 수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업계에 따르면 시장에 널리 퍼진 '안시루멘(ANSI Lumen)', '럭스(Lux)', 'LED 루멘', '광원 밝기(Lamp Brightness)' 등의 용어가 빚어낸 착시 현상이라고 꼬집는다.
많은 소비자가 프로젝터 밝기의 정답으로 알고 있는 '안시루멘'은 사실 옛말이다. 안시루멘은 1990년 미국국가표준협회(ANSI)가 제정한 '미국 국가 표준'일 뿐이다. 글로벌 디스플레이 시장이 통합되면서, 2005년부터는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가 공동 제정한 ISO 21118 국제표준인 'ISO 루멘'으로 완전히 대체됐다. 심지어 과거 안시루멘을 만들었던 미국 ANSI조차 현재는 ISO 21118을 공식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국제표준이 'ISO 루멘'으로 정립된 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거의 기준을 혼용하는 곳이 많은 셈이다.
더 큰 문제는 'LED 루멘'이나 '광원 밝기'라는 교묘한 꼼수 표기다. 프로젝터의 진짜 밝기는 '소비자의 눈에 최종적으로 맺히는 스크린 상의 밝기'를 의미해야 한다. 하지만 LED 루멘 등은 프로젝터 렌즈를 통과해 스크린에 도달하며 발생하는 엄청난 빛의 손실률을 무시하고, 단순히 기기 내부의 '전구(광원)'가 내는 가장 밝은 빛만을 측정한 것이다.
진정한 국제표준인 'ISO 21118(ISO 루멘)'의 측정 방식은 매우 엄격하다. 외부 빛이 차단된 어두운 공간에서 완전한 백색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사한 뒤, 화면을 3x3 격자(총 9개 직사각형)로 똑같이 나눈다. 그다음 각 9개 직사각형의 정중앙에 조도계(광도계)를 놓고 빛의 세기인 럭스(Lux)를 측정한다. 이렇게 얻은 9개의 럭스 평균값에 실제 투사된 화면의 면적(㎡)을 곱해야만 최종적인 '루멘' 수치가 산출된다.

◆ 반쪽짜리 스펙은 그만… 백색 밝기와 '컬러 밝기' 동시 확인해야
전문가들은 백색 밝기(ISO 루멘) 확인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프로젝터로 흑백 문서만 볼 것이 아니라면, 화면의 선명도와 생생한 색 재현력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컬러 밝기(Color Light Output)' 역시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백색 밝기가 ISO 21118 규정을 따른다면, 컬러 밝기는 국제디스플레이측정위원회(ICDM)가 제정한 IDMS 15.4 표준을 따른다. 측정 방식은 백색 밝기와 유사하다. 백색광 대신 적(Red), 녹(Green), 청(Blue)의 3가지 기본 색상 교차 그리드를 투사하여 각각 9개의 측정값을 얻어낸 뒤, 3원색의 평균을 합산하고 화면 영역을 곱해 컬러 루멘을 계산한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저가형 프로젝터나 휴대용 제품 상당수는 '1-Chip DLP' 방식을 사용한다. 이 방식은 백색 광원에서 나온 빛을 회전하는 컬러 휠(Color Wheel)로 통과시켜 적, 녹, 청색을 '순차적으로(교대로)' 투사한다. 인간의 눈에 남는 잔상을 이용해 색을 조합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빛의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백색 밝기 대비 컬러 밝기가 현저히 떨어진다. 때로는 무지개 같은 띠가 아른거리는 '레인보우 현상'이 눈의 피로를 유발하기도 한다.
엡손은 자사의 모든 프로젝터 제품에 국제표준인 ISO 루멘(백색 밝기)과 IDMS 15.4(컬러 밝기)를 엄격히 적용해 투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번 야버(Yaber)와의 소송전 역시 단순한 기업 간의 견제를 넘어, 검증되지 않은 가짜 스펙을 퇴출하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엡손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한국엡손 관계자는 “국제표준 ISO의 루멘에 따라 밝기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할 때 소비자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할 수 있고, 시장 역시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며 “온라인 쇼핑몰에서 빔프로젝터를 구매할 때는 'LED 루멘'과 같은 현혹성 문구에 속지 말고, 반드시 국제표준 기준 측정값인지, 그리고 컬러 밝기 수치가 충분한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프로젝터 시장이 고도화될수록 기업들은 단기적인 꼼수 스펙 마케팅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글로벌 1위 기업 엡손이 쏘아 올린 '루멘 캠페인'과 '국제표준 준수 촉구'가 혼탁한 프로젝터 시장을 정화하고 소비자들에게 올바른 시청구권을 돌려주는 결정적 계기가 될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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