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에 밀린 '휴민트'의 아쉬운 성적표, 류승완 피로감 때문일까?
[하성태 기자]
류승완 감독도 다큐를 연출한 바 있다. 13년 전 TV용 다큐였다. 2011년 MBC가 <타임>이란 제목으로 창사 5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기획했다. 공중파 방송이 류승완·이명세·김현석 등 흥행과 비평 면에서 잘 나가던 감독들에게 만들고 싶은 주제를 골라 보라 제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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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휴민트> 스틸컷 |
| ⓒ NEW |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남북 관계를 처음 다룬 첩보 스릴러였다. 한석규와 하정우, 전지현과 류승범이 출연했고, 한국판 <본> 시리즈란 평가와 함께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런 시대였다. '종북'이란 딱지를 통한 레드 콤플렉스가 현존했다. 김정은은 미국과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독재자로 떠올랐다. <쉬리> 이래 남북 대결이란 소재가 첩보 스릴러로 통용될 만한 시기였다.
그 <간첩>으로부터 10년 후 <모가디슈>가 왔다. '본' 시리즈의 한국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서 극적으로 동반 탈출한 남북 외교관들'이란 태그라인은 실화라는 배경 속에서 더 빛을 발했다. 서사와 인물 갈등, 시대적 배경 모두 탄탄했고, 후반부 자동차 액션은 명불허전이었다.
시대는 어땠을까.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만나며 평화의 기운이 일렁였다. 비록 평창동계올림픽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젊은 세대의 통일에 대한 감각은 엷어졌지만 국제 정세 속 남북 이슈는 진행형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30년이나 지난 남북 외교관들의 실화는 할리우드 영화 속 '외교관 탈출 서사'와 맞물려 <모가디슈>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2026년 설 찾아온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세 번째 '남북' 소재 영화로, 제작비는 235억 이상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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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휴민트> 스틸컷 |
| ⓒ NEW |
류승완이란 이름은 어느덧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액션키드 시절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관객 수가 아쉬웠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다. <부당거래>는 본격적으로 '나쁜 검사'를 묘사한 정치 스릴러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베테랑>으로 천만 신화를 썼다. 영화 안팎으로 뼈 아플 수 있는 <군함도>를 제외하곤 한국에서 류승완의 이름값을 부정할 수 있는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휴민트>의 중간 성적은 여러모로 눈에 띈다. 경쟁작인 <왕과 사는 남자>가 설 연휴를 거치며 지난 21일(토)까지 526만(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을 돌파하는 사이 <휴민트>는 149만 동원에 그쳤다. 전적으로 <왕과 사는 남자>보다 1주 늦게 개봉한 배급 전략만을 탓하기엔 개봉 후 반응이 심상찮다.
소위 '올드 패션'이란 지적이 적잖다. <휴민트>의 태그라인은 <베를린>을 닮았지만 훨씬 단순해졌다. 제3지대 성격이 강한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에 맞서 북한 식당 여성 종업원 채선화(신세경)을 구출하기 위해 펼치는 액션 드라마 자체가 신선하지도, 새롭지도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후반부를 뒤덮은 총기와 맨몸 액션을 향한 열광에도 불구하고 전체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첩보 스릴러란 장르 자체는 문제가 없다. 도리어 그 배경 속 남북 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도식화된 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남북 관계는 여전히 첨예하지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청년 류승완이 간첩을 찾아 헤매던 시대와는 결을 달리한다. 한국영화 주 관객층인 2030 세대는 남북 통일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다. 전 정부의 각고의 노력(?) 끝에 북한 역시 '하나의 민족'을 포기해 버렸다.
2기 트럼프 정부가 재차 김정은에게 러브콜을 보내고는 있지만 성과가 시원찮다. 누군가에게 북은 현재 비상계엄을 통해 내란을 일으켰던 정치 세력이 드론 공격 등을 통해 국지전 도발에나 필요한 적대 세력일 뿐이다. 현 정부의 화해 모드 조성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이나 <모가디슈>가 개봉하던 시기와 온도차가 상당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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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휴민트> 스틸컷 |
| ⓒ NEW |
<휴민트>에서도 그 피로감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국정원 요원 조 과장 캐릭터가 그 예다. <베를린> 속 '투덜이' 한석규와는 또 다르다. 인물에 대한 이러저러한 배경 설명을 최대한 절제한 채 사건으로 직진하는 <휴민트> 속 조 과장이 목숨을 걸고 북한 여성 채선화를 구해내는 과정은 맹목에 가깝다. 액션 영화 속 캐릭터의 단순함이 때로는 미덕일 순 있으나 조 과장의 그것은 맹목이라 감정이입을 저해하는 수준이다.
황치성은 박건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인민영웅 표종성을 말로를 길게 설명한다. 표종성은 <베를린>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바로 그 북한 비밀요원 캐릭터다. 블라디보스토크란 물리적 배경을 고리로 <베를린>과 <휴민트>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장면이자 팬 서비스의 일환인 건 맞다. 하지만 묘사하지 않고 설명하는 데서 오는 영화적인 게으름이란 지적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후반부 액션은 류승완의 장기이자 숨이 턱 막힐 만한 경천동지다. 맨몸 액션은 성룡이 <비룡맹장> 등에서 파트너 삼았던 킥복싱 챔피언 출신 베니 어키데즈와의 강력하고 둔중한 무게감을, 총기액션의 아이디어나 동기는 리암 니슨의 <테이큰>을 닮았다.
그건 흠이 아니다. 다만 조 과장의 피로감이, 납작하고 단순화된 조 과장의 동기가, 박건과의 앙상한 앙상블이 그 액션의 감정적 크기를 감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휴민트>의 에필로그 속 조 과장의 후일담이 공허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류 감독은 최근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에세이집 <재미의 조건>을 출간했다. 여기서 류 감독은 <휴민트>를 분기점이라 표현하며 "예전엔 젊은 에너지로 밀어붙이고, 거칠게 튀고, 자극을 더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방식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자극을 많이 뺐다"는 부연과 함께.
맞다. <휴민트>는 촬영과 영상 자체에서 영화적인 극적 활력을 밀어붙인 기존 류승완표 액션 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 베테랑2 >로부터 지속된 어떤 피로감의 연장선인지, 영출적인 결단의 말로인지는 차기작 < 베테랑3 >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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