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가 했더니, 권력이 바뀔 때마다 손을 댄 성곽

이영천 2026. 2. 2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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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③]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까지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막혔던 백악이 스르르 열렸다. 그랬어도 자연스럽진 못했다. 동쪽은 말바위 안내소, 서쪽은 창의문 부근에서 신분증 제시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완전한 개방은 아니었다. 오래 닫혔던 길엔 그런 절차가 잔재처럼 남았었다. 군사 시설로 막힌 기억이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비로소 다 열렸다.

휘어 굽은 성곽이 숲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즈넉하다는 건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게 실감 난다. 숙정문에 오르는 동안 성 돌 사이로 여러 시대의 흔적이 겹쳐 보인다. 태조의 성과 세종의 성, 숙종의 성 돌이 모양과 크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깎인 성 돌 하나에도 각 시대의 기술과 자본, 노동 숙련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도성을 쌓고, 고치고, 다시 수리한 각 왕의 시대는 안정된 치세에 모든 게 풍성했다고 추정된다. 옛말로 태평성대였을까.

도성 북문이니, 겨울을 상징한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4대 문의 하나로 성문을 두었으나,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왕조시대 내내 문루가 없었다. 따라서 무지개 모양의 문도 늘 닫혀 있었다.
▲ 숙정문 무지개 모양 문은 왕조시대 내내 닫혀 있었다. 1.21(1968) 후인 1976년 성벽 위에 벽돌로 여장을 쌓고, 문루를 앉혔다. 현판은 그때 쓰였다. 사진 오른 쪽으로 쌓은 모양이 다른, 각 시대의 성벽이 보인다. 사진은 2월 초의 전경.
ⓒ 이영천
북문이 문루를 갖추게 된 건 아이러니다. 1968년 무장한 31명의 북한군이 청와대를 직격으로 노려 침투한다. 이른바 '1·21사태'다. 이때 한양도성이 방어용 시설로 재조명되었나 보다. 1976년 북문 위 성벽에 벽돌로 여장을 얹고, 문루를 앉혔다.

성곽은 이처럼 한 번 쌓고 만 구조물이 아니라, 권력이 바뀔 때마다 다시 손을 덧댄 장소였다. 촛대바위 옆에 박혔었다는 일제의 쇠말뚝도 마찬가지다. 땅의 기운을 끊겠다는 말이 미신처럼 들리지만, 이 땅의 기운과 산이 품은 질서를 무력화하려는 의도만은 분명히 읽히고도 남음이 있다. 닫히고, 덧씌워지고, 다시 열리는 시간이 이 짧은 구간에 포개져 있다.

성은 남고, 사람은 흐르고

숙정문 밖 성곽에서 단원 김홍도의 '성하부전도(城下負錢圖)'가 떠오른다. 그림에는 산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모양의 성곽이 화폭을 채웠다. 그 아래를 보부상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지난다. 각기 다른 시대에 성곽이 쌓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성하부전도(城下負錢圖) 단원 김홍도의 그림. 각기 다른 시대에 쌓인 성벽을 배경으로, 길을 가는 보부상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 한국테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성곽은 땅에 박혔지만, 사람과 재화는 물처럼 흐른다. 이 흐름의 경계가 성곽이다. 멈춤은 자체로 끊김(滅)이다. 통제나 조절일 수 있다. 이를 위해 쌓은 구조물 아래로도 흘러야만 하는 게 곧 이음(生)이다. 단원의 그림에서처럼, 어쩌면 성곽이 생멸의 주관자인지 모르겠다.
숙정문에서 급변한 능선의 가파름이 제법이다. 성곽은 유려하게 여러 번 몸체를 구부렸다가 다시 편다. 촛대바위를 지나 한참을 그렇게 기어오른다. 그 정점에서 밖으로 길게 뻗어나간 성벽이 걸음을 잡아당긴다. 치성(雉城)과는 또 다른 곡장(曲墻)이다.
▲ 백악산 백악 곡장에서 바라 본 백악산. 도성 법궁인 경복궁의 뒤를 지키는 산이다. 한양도성 성벽이 길게 뻗어 백악 마루로 향하고, 너머로 인왕산에도 성벽이 아스라하다. 왼쪽으로 어렴풋이 남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 이영천
능선 셋이 한데 모인 곳에 곡장이 앉았다. 동쪽은 북악팔각정이고, 서쪽이 백악 정상이다. 성곽이 곧 길이 된 자리다. 길은 이처럼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팔꿈치처럼 맺혀서 이루어진 일종의 '마디(結節)'다. 이 마디가 모든 변화의 실마리인 셈이다. 발전과 쇠락도 이 마디를 어김없이 거치게 마련이다. 흐른다는 건 그래서 바뀜과 이음의 연결이다. 그게 비록 고단한 시시포스(Sisyphus)의 노동일지라도 말이다.
▲ 청운대 백악 마루로 오르는 중간 지점에서 일종의 쉼터다. 사진 오른쪽으로 경복궁과 육조거리, 남산이 또렷하다.
ⓒ 이영천
청운대에 가까워지면 이 대비가 더욱 또렷해진다. 성곽이 높고 단단해질수록, 그 아래를 따라 길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 구간을 걷다 보면, 성곽이 도시를 막았던 시간보다 사람들이 성을 우회하며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 1.21 소나무 1968년 01월 21일, 무장한 북한군이 침투해 교전을 벌일 당시 소나무에 총탄이 박혔다. 그 흔적을 남겨 표징으로 삼고 있다.
ⓒ 이영천
백악 마루에 다다르기 전 1·21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총탄을 품은 채로 살아남은 나무다. 손뼉이 맞부딪치듯 사건은 분단이라는 비극과 월남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당시 정권은 이를 '사태'라 불렀다. 그리고 소나무보다 더한 흔적을 남겼다. 숙정문이 문루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위에서 본 도성의 법궁

백악 마루다.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본다. 경복궁이 정남이 아닌 관악산을 향해 틀어 앉았다. 일제가 육조거리와 세종대로를 넓히면서, 그 축을 정남인 남산으로 잡았다. 그들이 세운 조선신궁을 향한 축이다. 따라서 경복궁이 앉은 방향과 살짝 어긋나 있다. 이는 여기보다 촛대바위에서 더 명확하게 보인다.
▲ 경복궁과 육조거리 촛대바위에서 바라 본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 관악산을 향한 근정전-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건축선이 명확하며, 육조거리였던 광화문 광장과 틀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영천
경복궁 좌향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외사산(外四山) 중 남쪽 관악산에 잇닿아 있다. 여러 설이 비등하나, 불의 기운을 경계했음만은 분명하다. 집이건 궁궐이건 산을 바라보고, 혹은 배경으로 삼는 게 우리 전통이다. 백악을 뒤에 둔 경복궁이, 멀리 관악을 향한 건 어쩌면 그 이치 아닐까. 눈앞의 중심보다, 멀리 있는 균형과 위협을 먼저 의식한 배치다.

이 높이에서 궁궐의 축선과 마당, 담장의 질서가 한눈에 들어온다. 왕조는 이처럼 드러내는 방식으로 권력을 작동시켰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옮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청와대가 앉은 곳이다. 건물군은 숲과 지형 안에 숨어있다. 윤곽조차 또렷이 잡히지 않는다. 조선 총독의 관사를 그대로 이어받아, 최고 권력자 집무실로 삼은 부끄러움을 감추려 의도했을까.

내보여야 할 것을 감췄었다. 감추지 말아야 할 것도 비밀과 보안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었다. 그게 알량한 권력의 속살인가. 최고 권력이 다시 백악 아래로 옮겨 왔다. 이제는 보여주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 부암동 백악 마루 부근에서 바라 본 부암동. 인왕산 자락이 둘러 분지를 이룬 모습이, 무척 아늑해 보인다.
ⓒ 이영천
백악 마루가, 각 권력이 행한 백성을 향한 차이를 한 자리에 내놓는다. 왕조는 권위를 드러내며 통치했고, 공화정은 보여주지 않고 감춤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둥근 삿갓처럼 보이는 백악이, 새삼 날카롭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그간 권력이 매개한 억측일까.

남겨진 이름, 이어지는 발걸음

백악 서쪽은 급경사다. 이 길로 올랐다면 다리가 풀렸음 직하다. 고개를 드니 지네 같은 성벽이 길게 흐르는 인왕이 눈앞에 나타난다. 1·21 같은 사건은 흘러갔고, 흔적으로써 성벽은 생물처럼 남았다.
▲ 북한산 한양도성 백악에서 바라 본 북한산 비봉능선. 왼쪽 족두리봉에서 오른쪽 보현봉까지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보현봉이 안평대군의 꿈 '몽유도원도'의 현시다.
ⓒ 이영천
성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절경이다. 도시가 아니었다면 신선이 살았음 직하다. 가까이로는 부암동이다. 무계정사 터가 지척이다. 안평대군 꿈이 그림이 된 '몽유도원도'가 멀리 북한산 보현봉이다. 몽유도원도의 현시다.
▲ 석파정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알려진 석파정. 인왕산 아래 아름다운 작은 계곡에 앉았다.
ⓒ 이영천
족두리봉에서 시작된 비봉능선이 공룡 등처럼 묵직하고도 아기자기하다. 안평대군의 꿈이, 흥선대원군의 와신상담으로 맺혀졌을까. 나라를 오로지 하던 안동김씨로부터 빼앗다시피 차지한 석파정의 집들이 검게 정연하다.
부암동과 청운동의 물을 가르는 분수령에 창의문이 앉았다. 왕조시대에도 열었다 닫기를 밥 먹듯이 한 문이다. 궁궐 뒤에서 백성들이 드나드는 걸 꺼려서였을까. 아니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를 미리 경계하고자 함이었을까. 아무튼 그런 반복이 역사가 되었다. 북한산 계곡물에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에서 반역을 모의한 무리가 능양군을 앞세우고, 이 문을 통과해 권좌를 빼앗았으니 그 염려가 기우는 아니었던 셈이다.
▲ 창의문 북소문인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부른다. 왕조는 여러 이유로 이 문을 늘 경계로 삼았다. 세검정과 이 문이, 인조반정의 무대이기도 하다.
ⓒ 이영천
인조의 후손 영조가 그 무리 이름을 이 문에 써 붙였다던가?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명단에서 빠졌다던가? 북소문이자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4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숙정문에서 창의문에 이르는 도성 구간도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길의 흐름이 한미했음에도, 권력의 뒤통수를 자주 두들겨댔으니 권력 입장에서 가장 경계한 곳이 아니었나 싶다.
▲ 1.21 순직 경찰 동상 1.21 당시 침투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순직한 두 분 경찰관의 동상. 윤동주 문학관 맞은 편이다.
ⓒ 이영천
조금 더 내려오면 창의문 옆에 경찰 동상 둘이 서 있다. 역시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1·21의 희생자다.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당시 최고 권력자는 그들의 죽음을 진정 애도했을까. 아니면 정권을 지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을까. 모호하다. 다만, 직무에 충실한 안타까운 희생임은 분명하다. 동상으로 남았으니, 그분들께 작은 위로라도 되었을까.

숙정문에서 시작해 창의문으로 빠져나온다. 성곽은 여러 시대의 손을 거쳤고, 길은 그 사이를 묵묵히 이어 왔다. 닫혔던 공간이 열렸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은, 백악 성곽을 이제 누구나 거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길의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그렇게 백악을 오르는 발소리로 조용히 증명된다. 길은 흘러야 한다. 백악이 그걸 힘겹게 증언하고 있다.

- 이후 기사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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