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의 '역린'을 건드린 뒤에 벌어진 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2. 2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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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바로잡은 역사] 강창성 '뇌물죄' 무죄 판결

[김종성 기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비서관인 전두환에게 군인이 아닌 정치인의 길을 제안했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은 제6대 총선이 있었던 1963년에 "박 의장이 나를 부르시더니 군으로 돌아갈 것 없이 예편해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저는 군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데도 박정희가 계속 강권하자, 전두환은 "그럼, 집에 가서 집사람과 의논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에 박정희는 안색을 바꿨다. "나는 전 대위를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형편없구만"이라며 "아니, 그런 일을 집에 가서 안사람과 상의하겠단 말인가"라고 그는 말했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가봐"라는 말로 이 대화는 끝났다.

전두환은 군부 정당의 의회 장악을 위한 박정희의 출마 지시는 거부했지만, 그의 또 다른 지시만큼은 철저히 수행했다. 1963년 그해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밀명에 따라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고, 4년제 육사의 출발점인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을 그 뒤 은밀히 끌어들였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위협했던 군인
 1995년 10월 31일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창성의 모습
ⓒ 연합뉴스
육사 2기인 박정희는 육사 5기(정승화 등)와 육사 8기(김종필 등)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나회는 박정희가 이 구도에서 벗어나 직속 파벌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만 해도 약 120명이 이 파벌에 흡수됐다. 한 기수에서 12명 정도가 포섭됐던 것이다.

하나회 회원들은 박정희의 배후 지원 속에 군부 요직을 하나둘씩 차지했다. 그렇게 확보한 요직은 그들 내에서 대물림됐다. 일례로,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직은 하나회 소속인 손영길(11기)·전두환(11기)·박갑룡(11기)·이종구(14기)·고명승(15기)·장세동(16기)·김진영(17기)에게 차례로 넘어갔다.

이처럼 군부 내에 또 다른 군부가 암약하는 실상을 온 세상에 드러낸 군인이 강창성(1927~2006)이다. 지난달 30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징역 3년 및 몰수형과 추징선고를 받은 강창성에 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상고를 포기했다.

재심의 대상이 된 판결은 1981년 4월에 확정된 유죄선고다. 해안항만청장 재직 시절의 비리 및 금품수수 혐의가 유죄선고의 근거가 됐다.

그런데 강창성이 유죄선고를 받은 실질적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육군보안사령관 재직 시절에 '윤필용 모반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하나회의 존재를 인지한 뒤, 모반사건보다 하나회 사건을 중점적으로 수사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24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19권에 따르면, 강창성 해운항만청장 당시에 항무과장과 총무과장을 역임한 강아무개씨는 이 위원회에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2·12 이후 강창성 청장이 해임되고 난 후 집에 계시다가 보안사로 끌려갔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해임될 때부터 '전두환 신군부가 보복할 거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있었다. 12·12 사태 발생 후 강창성 청장이 굉장히 불안해 했다. 군 재직 때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 핵심들을 너무 가혹하게 처벌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의 육사 8기인 강창성은 1971년 9월 23일 김재규 후임으로 육군보안사령관이 됐다. 이로부터 1년 반 뒤인 1973년 3월 2일, 그는 청와대 호출을 받았다. 이후락·박종규·김재규와 더불어 정권 4인방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의 모반 혐의를 수사하라는 지시가 이날 떨어졌다.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술자리에서 정권 후계자의 필요성을 언급한 일을 수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강창성은 윤필용의 모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취중 발언 외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육사 8기인 윤필용과 가까운 장교들이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묶여 있는 사실을 포착했다.

그래서 하나회 쪽으로 수사 초점을 돌린 강창성은 전두환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처리할 것을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군부 사조직을 결성한 주동자는 역모죄인으로 처벌될 수도 있었다. 강창성이 전두환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다.

박정희는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창성은 거듭해서 건의를 했다. 위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자신이 파악한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보안사에서 올린 하나회 핵심 장교 50여 명의 명단을 놓고 직접 ○, ☓, △ 표시를 하면서 구속·예편·감시 등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 처벌 대상자 명단에서 나와 노태우·최성택·정호용·박준병 등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이 직접 ☓표를 해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그 후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1973년 8월에도 나와 노태우 등에 대해 철저한 재조사를 위한 건의서를 올렸으나, 박 대통령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의 보복?
 1984년 10월 23일 대통령 재임 당시 국무회의 주재하는 전두환
ⓒ 연합뉴스
전두환의 사조직이 아닌 박정희의 사조직을 우연히 들춰낸 강창성의 수사는 왕조시대식으로 말하면 역린을 건드리는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역공을 받았다. '강창성이 경상도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라는 여론이 군부 내에 조성됐고, 이로 인한 압력을 견디지 못한 그는 그해 8월 중순에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나 제3관구사령관으로 옮겨갔다. 전두환에게 일격을 가하려다가 실패한 직후에 사실상의 좌천을 당했던 것이다.

전두환이 준장 계급장을 단 것은 1973년 1월이다. 전두환은 "나는 의욕과 사명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는 말로 그때의 설렘을 회고했다. 그 직후에 강창성이 전두환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관련되지 않았거나 박정희가 모른 체 했다면, 윤필용 모반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모반사건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수도 있다. 전두환이 이때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12·12 및 5·17 쿠데타 뒤에 강창성에게 보복을 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제3관구사령관으로 밀려났다가 군복을 벗은 강창성은 1976년 3월 13일에 항만청장이 됐다. 이듬해 12월 16일부터 해운항만청장으로 명함을 바꾼 그는 12·12 쿠데타 2개월 뒤인 1980년 2월 22일까지 재직했다. 그런 뒤, 5·17 쿠데타 2개월 뒤인 7월 23일 자택 앞에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청장 재직 당시의 비리와 금품수수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합수부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 본인뿐 아니라 해운항만청 직원들도 압박했다. 해운진흥과장이었던 최아무개는 서울시청 인근인 무교동 국제호텔로 연행돼 전임 청장의 비리를 제보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1981년 4월 8일 자 <경향신문>은 강창성에 대한 2심 선고가 확정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해운항만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해운업계 대표 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인정됐다고 전했다.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강창성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982년 12월 24일 가석방됐다.

2024년 5월 2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창성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 구금된 사실과 수사 과정에서 협박 등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고 강창성 및 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대한민국 국가에 권유했다.

재심을 담당한 법원은 유죄 인정의 근거가 된 자백의 효력을 부인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고법은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된 후 가혹행위를 당해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에서 허위로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 자백 진술을 했다고 판단"된다고 인정했다. 자발적 진술을 하기 힘든 상태에서 자백한 내용이 검찰 공소장에 기재됐으므로 자백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자백 이외의 다른 증거들로는 혐의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강권을 뿌리치고 군에 남았다. 그런 그를 강제 전역시킬 뻔했던 인물이 강창성이다. 전두환 정권이 강창성에게 씌운 혐의가 아무 근거가 없다는 서울고법의 재심 판결은 1980년의 강창성 체포 및 기소가 전두환의 보복이었다는 시각에 한층 더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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