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소금, '미나리타령'

김삼웅 2026. 2. 2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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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향연 95] 흔히 게릴라 활동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된다

[김삼웅 기자]

 타이항산 자락 윈터우디춘(雲頭低村) 마을의 출입문 위에 쓰인 한글로 "왜놈의 上官(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고 씌어 있다.(위) 밀양시에 조성된 항일 테마거리에 재현되어 있는 구호(아래)
ⓒ 김태빈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 특히 백두산이나 타이항산 등 깊은 산중이나 인가가 없는 만주 내륙에서 빨치산활동과 게릴라 무장투쟁을 하는 경우, 식량·신발·성냥·소금이 가장 곤란한 문제였다. 도시에서 단체를 만들고 광복운동을 하는 경우는 부단한 일제군경과 밀정들의 추적으로 안위가 위협을 받았으나, 적어도 성냥이나 소금 등 생존의 절대 필수품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몸이 붓고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과다 섭취는 인체에 치명상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흔히 게릴라 활동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된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게릴라는 주민들의 지원이 있어야만 활동이 가능하다. 베트남이나 남미지역의 게릴라 활동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한반도와 만주·노령에서는 겨울의 혹한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항일투쟁이 그만큼 어려웠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할 때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의병지역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약탈하고 모조리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의병마을에 들어가면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고 장독을 깨부수고 소금가마는 우물에 던졌다. 또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이 인근 지역 조선인 거주 마을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경신참변' 때도 유사했다. 활동의 근거지를 없애버리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이 소설의 귀중한 참고자료다.
ⓒ 민족문제연구소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소금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의 회고록, 해삼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시절의 일이다.
깊은 내륙이라 소금이 귀했다. 50리, 60리 가야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 농삿거리 서너 말 가져 가야 소금 한 말 바꾸는데 농삿거리가 있어야지. 또 있다 해도 누가 무거운 걸 지고 그 먼곳까지 갈 사람이 있어야지. 바깥 어른들은 독립운동 하시고 주로 외지에 나가 계셨으니까.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105쪽, 정우사, 1995.)

우리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들이 '먹고 입고 자는' 인간의 기본 문제가 삭제된, 마치 로봇처럼 그려진다. 단체들의 조직·강령·대일항쟁 과정 등은 상세히 소개된 데 비해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거처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립운동의 거시사(巨視史)는 어느 정도 연구가 돼 있는데 비해 여성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의료·장비·식생활 문제 등 미시사(微視史)는 아직 초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제학이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독립운동사도 미시사쪽에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게릴라 활동의 특성상 제도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이어 중국 화베이(華北) 타이항산(太行山) 전투 당시 부녀국 대장이었던 이화림(李華林)은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대원들의 의식주 문제를 기록하였다. 이화림은 1939년 구이린(桂林)에서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1년 다시 타이항산 지구 팔로군 항일근거지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타이항산은 그야말로 산제비도 날기 어렵다는 고산지대이다. 일본 관동군 주력부대가 주변을 포위하여 산속에서 게릴라 전술로 일제와 대결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반소탕 작전에 참여한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녀자들은 모두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캐거나 대자연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구했다. 타이항산의 산나물은 우리들에게 '훌륭한 음식'이었고 모두 조선의용군을 구제했다.

그때 나는 부녀국 대장이었기 때문에 매일 대원들을 이끌고 산비탈이나 강가에 가서 산나물을 채취했다. 산나물은 뜨거운 물에 데쳐 볶아서 먹거나 또 겨와 섞어서 워워터우(만두 종류)를 만들어 먹었다.(...)

우리 여자 동지들이 캔 산나물은 평소에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말린 후에 비축해 놓고 겨울에도 먹었다. 채소를 해결하긴 했으나 산에서 소금이 매우 부족해 우리들은 짠맛 나는 돌을 갈아서 나물과 섞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화림 회고록>, 박경철·이선경 옮김, 292~293쪽, 차이나하우스, 2015.)

"짠 맛 나는 돌을 갈아서" 염분을 채취했다는 이화림의 기록은 눈물겨운 비사일 뿐만 아니라 그 지혜에 놀랍다. 염분이 들어 있는 암석을 어떻게 골랐을까.

타이항산 시절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전투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다 해방 후 석방된 김학철(金學鐵)의 증언이다.

물 속(개천-필자)에 뛰어들어 한바탕 분탕질을 친 끝에 가까스로 여메기 한 놈을 붙잡는 데 성공을 했다. 그놈으로 즉석요리를 할 판이나 술은 더 말할 것 없고 소금 한 톨도 없는지라 그냥 맨걸로 모닥불에다 구워먹었다. 식인종들처럼 알몸으로 냇가에 둘러앉아서.

적군의 봉쇄로 타이항산에는 소금이 귀하기가 금싸라기 맞잡이어서 거무튀튀한 돌소금 1금(16냥중)에 4원(돼지고기 2근 값)씩 했으므로 우리같은 대위급 장교의 한 달 급료(3원 50전) 쯤은 전액을 투입한 대도 돌소금 1근을 온통으로 살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김학철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257쪽, 문학과 지성사, 1995.)

타이항산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비참했던 식생활은 한국이 낳은 중국의 대표적인 항일음악가 정율성(鄭律成)의 기록에도 보인다. 1919년 김원봉 등과 의열단 창단에 참여한 정율성은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이어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옌안과 타이항산 전투에서 일제와 싸웠다.

1940년 초에 접어들면서 국민당이 30만 대군을 동원해 옌안을 봉쇄하자 그렇지 않아도 물자가 부족했던 옌안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마오쩌둥(毛澤東)조차 손수 밭을 일구어야 했으며, 입을 옷도 없을 지경이었다.

강냉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겨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서 도토리·미나리·범벅 떡도 해먹고, 감에다 겨를 발라서 단겨 떡도 해 먹었다. 먹을 때는 좋았지만, 먹고 나면 감에 들어 있는 성분 때문에 뒤가 막혀 며칠 씩 변을 보지 못해 고생했다.

제일 귀한 것은 소금으로 염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였다. 오죽하면 소금기가 배어 있는 돌가루를 소금 삼아 우려먹기까지 했을까.(이건상, <항일음악전사 정율성>,120~121쪽, 대동문화, 2007.)

정율성은 타이행산에서 투쟁하는 전우들의 전의를 북돋우고 배고품을 달래기 위하여 한국 전통민요 〈도라지 타령〉에 가사만 바꾼 〈미나리 타령〉을 작곡하여 함께 불렀다.

미나리 타령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 돌미나리
한 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에 찰찰 넘치는구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리 뜯어라 지화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다.(앞의 책, 121쪽.)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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