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국인들 매료시킨 배우 김염의 묘비
[배상국 기자]
청년백범은 상해에서 중경까지 27년간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국권회복'과 '항일전선'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중국 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답사를 진행해 왔다.
올해는 특별히 '백범 김구 선생 탄신 150주년'과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백범 김구의 해'를 맞이하여 다양한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여정으로 청년백범(이하 청백 16기)은 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상해를 포함해 가흥, 항주, 남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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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백범16기 상해로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 2026년 1월22일 청년백범16기는 4박5일의 일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답사를 떠났다. |
| ⓒ 청년백범16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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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 복수원 정문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묻혀있는 상해 복수원 |
| ⓒ 청년백범16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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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 복수원 인문기념관 상해 복수원 인문기념관 전경 |
| ⓒ 청년백범16기 |
1910년 대한제국 한성에서 태어난 김염(본명 김덕린)은 2살 때 만주 통화로, 7살 무렵 흑룡강성 치치하얼로 이주한다. 아버지가 망명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최초의 서양 의사 중 한 사람이며 신민회의 멤버였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으로 105명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자, 김필순은 국경을 넘는다. 이후 그는 의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9년 9월경 일본인 조수가 건넨 우유를 마시고 갑자기 급사한다.
아버지를 잃은 김염은 어린 나이에 고모 집에 맡겨진다. 그의 고모 김순애는 김규식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김순애는 조카인 김염을 애틋하게 생각했지만 어려운 살림에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망명가의 처지였기에 살뜰히 챙기지는 못한다. 특히 친구인 김필순을 대신해 아버지 역할을 해야 했던 김규식은 김염을 엄하게 키웠다.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김염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염은 천진의 남개(南開)중학에 재학 중 가출해 홀로 상해로 간다.
하지만 17세 조선인 소년이 혼자 살아가기엔 국제도시 상해는 벅차도 너무 벅찼다. 굶기는 다반사요, 하늘을 이불 삼아 풍찬노숙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시절, 나라를 잃은 조선인은 그저 멸시의 대상이었다. 어디서나 '까오리빵즈'(조선인을 비하하는 욕설)로 불렸고, 누구와도 섞일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출을 감행하면서 다짐한 게 있었다. 꼭 영화배우로 성공하겠다고.
간절함이 통했을까?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김염은 <열혈남아>란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손유(孫瑜)가 이 영화를 보고 중국 배우들에게서 보기 힘든 외모를 가진 김염에게 매료된 것이다. 새로운 영화,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손유에게 김염은 딱 맞아떨어지는 배우였다.
김염은 손유의 <야초한화>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당시 영화사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철저한 무명에다 조선인이기까지 한 김염을 주인공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손유는 밀어붙였고 이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때부터 김염은 날개를 달았다. 젊고, 잘생기고, 균형 잡힌 근육질 몸매의 이 사내에게 중국인들이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꽃미남 왕자님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으면 팬레터를 보낼 때 주소 없이 '상하이 김염'이라고만 쓰면 배달될 정도였다.
그러던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2년 1월 28일 상해는 일본의 침공으로 불바다가 된다. 이때 손유 감독은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 당연히 주인공은 상해 최고의 배우 김염에게 돌아간다. 그렇게 영화 <들장미>는 상해에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는 또 대성공. 이 영화를 기점으로 김염의 영화는 변화를 맞이한다. 더 이상 꽃미남 왕자님으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김염을 수식하는 단어 중 하나가 '항일영화의 상징'이다. 김염은 중국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영화로 저항한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손유의 <대로>다. 1935년 1월 1일에 개봉한 이 영화에서 김염은 주인공 진꺼(金哥)역을 맡는다. 이 영화는 중국 영화 역사에서 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제곡인 <대로가>와 <개로선봉가>는 우리의 <아리랑>처럼 당시 중국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국민가요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토록 멸시받던 '까오리빵즈'가 일본과의 항전에서 <대로가>를 부르며 중국인들을 이끌고 선두에 선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중국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도 '영화황제'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인기투표에서 남자배우 부문 1등을 차지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항일 전선의 선봉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50년대 후반, 위 수술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소화장애를 얻게 된다. 그로 인해 영화 출연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힘든 지경에 놓인다. 설상가상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고 결국 회복을 하지 못한 채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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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염 묘소에 참배하는 청년백범16기 복수원 2번문으로 들어가면 쉽게 김염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다. 김염의 묘비 옆에 있는 백옥의 묘비에는 2022년 사망한 그의 부인 진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미 누군가 다녀갔는지 꽃다발이 놓여있다. |
| ⓒ 청년백범16기 |
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는 밈이 유행이라고 한다. 이는 문화의 힘을 강조했던 백범의 소원을 소환하는 현상이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100년 전, 나라도 없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만 했던 그가 어떻게 군사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닌 문화가 강한 나라를 꿈꾸었을까?
백범은 '영화황제' 김염의 활약을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그때 총과 칼을 들지 않고도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화,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소원>을 쓸 때, 백범의 머릿속 한편엔 김염의 모습이 조그맣게라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영화의 힘'을 통해 나라를 잃고 멸시받던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이 되어주었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김염은 '문화의 힘'을 강조한 백범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청백 16기가 김염을 만나기 위해 복수원을 찾아야 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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