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선고 묻자 "美기업 정치 표적"…백악관 뜬금 입장문에 정부 긴장
미국 백악관이 19일(현지시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데 대해 “한국의 사법 사안”이라며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통상 타국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던 기존의 대응 방식과 온도 차가 난다. 백악관은 또 “한국 내에서 미국 기업과 종교 인사가 정치적 동기로 인해 공격받고 있다”는 우려를 함께 표명했다.
기존 문법과 다른 반응…“입장 없다”
백악관은 이날 ‘윤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판결에 대한 입장’을 묻는 중앙일보의 질의에 “고위관계자의 발언”이라며 “우리는 한국의 사법적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윤 전 대통령에게 내란 수괴 혐의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한 법원의 판단에 대해 아무 입장을 내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는 유사한 상황에 대한 기존의 입장 표명 방식과 다소 차이가 난다.
트럼프 행정부는 2기 정부 출범 직후이던 지난해 4월 4일 헌번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하자, 국무부 대변인실을 통해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적 제도와 법적 절차,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냈다.
그러면서 “한·미 동맹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의 새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및 한국 정부와 협력하는 데 전념하겠다”며 “양국 모두에 안보와 번영을 가져올 긴밀한 협력의 미래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입장을 피력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윤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자 국무부를 통해 “중대한 우려를 표한다”는 입장을 냈고,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이끌어내자 백악관이 직접 나서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와 관련된 입장을 번복하고 국회의 계엄령 종료 표결을 존중한 것에 대해 안도한다”고 밝혔다.
尹과 무관한 첨언…“정치적 표적화 우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취지의 의례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 또 법원의 결정과 무관한 “한국 내 정치적 동기로 인한 표적화, 특히 종교인이나 미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례의 보도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악관은 정치적 표적이 됐다고 주장한 종교인과 미국 기업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만 JD 밴스 부통령이 지난달 23일 김민석 국무총리를 접견한 자리에서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와 개인정보를 유출한 쿠팡에 대한 수사를 먼저 언급했던 것을 고려하면 두 사안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악관이 해당 수사를 ‘정치적 동기로 인한 표적화’라고 규정한 것은 한국 당국이 진행하는 수사에 대한 가치 판단이 직접적으로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밴스 부통령과 만난 김 총리는 당시 특파원 간담회에서 “쿠팡 문제와 관련 미국 기업에 차별적 대우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명료하게 얘기했다”며 “밴스 부통령은 ‘한국 시스템 아래 무언가 법적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이해를 표했다”라고 설명했다. 손 목사와 관련해선 “한국은 정치와 종교가 엄격하게 분리돼 있고, 선거법 위반에 대한 조사가 있는 것임을 설명했다”며 불필요한 오해를 모두 해소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밴스 부통령과의 ‘핫라인’ 구축을 성과로 제시한 김 총리가 귀국한 직후 한국에 대한 관세를 기존의 15%에서 25%로 인상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핫라인을 통한 사전 협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로비 대상’ 아닌 백악관 입장…당국 긴장
통상 당국은 백악관이 공식 입장을 통해 사실상 쿠팡에 대한 수사를 직접 언급했다는 사실과 관련한 상황 파악에 나섰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통화에서 “백악관이 본건인 윤 전 대통령의 선고와 무관한 내용을 입장문에 담은 배경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며 “신속한 대미 투자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백악관이 쿠팡과 관련한 사안을 직접 언급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당혹스러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그간 쿠팡의 집중 로비를 받은 일부 미국 정치인이 쿠팡에 대한 수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해온 것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 차원의 대응과는 거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백악관의 공식 성명에서 사실상 쿠팡 사태가 언급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자금줄로 알려진 쿠팡의 투자사들은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을 ‘친중반미(親中反美)’로 규정하고 한국을 베네수엘라에 비유하며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절차에 돌입하는 동시에 미 무역대표부(USTR)에 직접 조사를 요청했다. 정보 유출 수사를 “미국 기업에 대한 불공정 조치”라는 주장을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확산하기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오는 23일 미 하원 법사위원회가 진행하는 비공개 의견 청취에 해롤드 로저스 한국 법인 임시 대표가 출석한다.

현지 소식통은 “마가(MAGA)와 쿠팡이 미국 기업에 대한 탄압 프레임으로 행정부에까지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시급하게 여기는 것은 대미 투자”라며 “쿠팡은 한국을 불편하게 할 사안일 수 있지만, 미국이 유리한 무역협상을 이끌기 위한 카드로 쓰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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