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명사 분실증'과 언어의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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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앞 입간판의 '꽃' 위에 내린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눈'이나 '꽃', 신호등의 '빨강' 같은 명사는 활발하게 살아있어서 잊어버릴 일이 거의 없겠다.
개인의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체계는 명사가 사라지면서부터 쇠퇴한다.
김중혁의 단편 '종이 위의 욕조'에는 '명사 분실증'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화가와 큐레이터의 대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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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긴 문장으로 사람과 사실 들을 말할 필요가 있다.
꽃집 앞 입간판의 '꽃' 위에 내린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눈'이나 '꽃', 신호등의 '빨강' 같은 명사는 활발하게 살아있어서 잊어버릴 일이 거의 없겠다. 이미지와 소리와 문자가 잘 붙어 있어서 눈[雪]은 보는 순간 눈이라는 소리와 글자를 함께 떠올리고, 꽃은 그 글자만으로도 꽃의 이미지가 보인다. '눈꽃'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인간의 감각에서 나온 순수하고 근원적인 명사들은 늘 생각의 한가운데서 살아 움직인다.

개인의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체계는 명사가 사라지면서부터 쇠퇴한다. 고유명사가 사라지고(기억나지 않고) 사람의 이름도 사라진다. 대화 중이라면 주로 '그것' 혹은 '걔'라는 대명사를 앞세워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김중혁의 단편 '종이 위의 욕조'에는 '명사 분실증'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화가와 큐레이터의 대화가 나온다. 둘은 '폭죽'이나 '수첩' 같은 명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대화에 애를 먹는다. "명사부터 잃어버린 다음에는 형용사와 동사를 잃어버리고…." 그렇다. 잊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이후 둘은 명사 말고 부사나 감탄사나 동사로만 얘기해보려 하지만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안다. 화가는 "말없이 그림만 그리면 된다."고 자조한다.
명사를 쓰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지금 사람들은 흔히 쓰던 명사나 사람의 이름은 잊어가면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조어와 새로운 명사들의 홍수에서 헤맨다. 진심과 의미는(때로는 진실마저도) 언어의 틈, 명사의 틈 사이로 빠져나간다. '에겐남', '테토녀' 같은 단어들은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 사용자의 과시와 단정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에 금방 유행하게 됐다. 쓰이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단어들이다. 어떤 단어들은 말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타인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기도 한다.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기 위한 정치적 신조어는 던져진 돌과 같아서 개인의 삶과 자아를 묵살하고 집단화한다. 이런 단어(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들은 목표와 용처가 명확해 좀처럼 잊히기 어렵다. 사용할 일이 없어서 떠올릴 일도 없으면 사라지겠지만, 공격의 대상과 성향이 바뀌지 않는 한 평생 개인들의 언어 사전 한복판에 굳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도 딱 그 단어만큼 한정하는 저주가 되기 쉽다는 것을 쓰는 사람은 모른다.
살면서 점점 기억나지 않는 '그것'과 '걔'에 대해 더듬어가며 설명할 일이 잦아진다. 그 설명의 말들은 명사 뒤에 가려져 있던 대상에 대한 감각(느낌)이나 기억에서 나오는 것으로, 익숙했던 명사 보다 구체적 실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인생을 축약하고 단정하는 명사에만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좀 더 긴 문장으로 사람과 사실 들을 말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촘촘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존중하는 일이다.
허영한 사진팀장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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