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엽의 괴짜열전] 진실 은폐하는 이기심, 그 이면의 초라한 인간 초상

2026. 2. 20. 00: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로 살인자 자처하는 영화 ‘라쇼몽’의 세 주인공


성민엽 문학평론가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서로 다르게 진술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화 ‘라쇼몽’(1950)에서 비롯된 말로서, 심리학·법학·사회학·경영학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라쇼몽은 헤이안시대(794~1185) 일본의 수도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의 성문 이름입니다. 원래 이름은 라조몽(羅城門)이고 라조, 즉 나성은 성을 둘러싼 성벽이라는 뜻이지만, 훗날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속명으로도 불리게 됩니다. 헤이안시대 말기 이후로 이 성문이 황폐해지고 시체와 사생아를 버리는 장소가 되었으며 귀신이 산다는 괴담까지 돌게 됩니다.

「 영화는 원작 소설에 대한 한 해석
나무꾼의 목격담이 영화의 핵심

아쿠타가와의 원작 소설 『덤불 속』
누가 범인인지 끝내 밝히지 않아

사실과 거짓 마구 뒤엉킨 소설
진실에 대한 회의 드러낸 글쓰기

사무라이와 도적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 [사진 마티 출판사]

황폐해진 라쇼몽에 승려와 나무꾼, 그리고 부랑자,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나무꾼이 포청에서 겪은 일을 부랑자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그에 따르면, 포청에 잡혀온 도적 다조마루가 자신이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진술했고,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고도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했으며, 죽은 사무라이 다케히로의 혼령도 무당의 입을 빌려 자신이 자신을 죽였다고(자결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세 사람 다 살인자를 자처하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의 살인 현장 목격담이 뒤늦게 추가됩니다. 이 목격담에 따르면 살인자는 도적입니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도, 사무라이의 아내도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도적 역시 거짓말을 했습니다. 단도를 보지 못했다며 단도 훔친 일을 은폐한 것입니다.

사무라이의 아내가 도적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장면. [사진 위키피디아]

세 사람의 진술 속에서 그들은 멋지거나 비장하거나 비극적입니다. 도적은 사무라이와 23번이나 합을 나누며 멋진 결투를 벌였고, 도적에게 겁탈당한 여자는 남편의 눈에서 차가운 경멸의 눈빛을 보았고, 밧줄에 묶인 사무라이는 남편을 죽여줘야 도적을 따라가겠다는 아내의 배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무꾼의 목격담에 의하면 여자를 겁탈한 도적은 여자에게 사랑을 애걸했고, 여자는 두 남자의 싸움을 부추겼고, 두 남자는 멋진 결투가 아니라 개싸움과도 같은 엉터리 칼싸움을 했으며, 사무라이는 도적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여자는 남편이 죽자 도망쳤습니다. 나무꾼의 눈에 비친 그들은 속물일 뿐입니다.

나무꾼의 진술은 믿을 수 있나
그들은 왜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 이렇게 묻기 전에 나무꾼의 목격담에는 거짓이 없는지, 그 목격담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부터 물어야 하겠지만 “이 시나리오는 그런 허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렸다”라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말에 비추어 보면, 나무꾼의 목격담은 거짓이 아닌 것으로(단도 훔친 일을 은폐한 걸 제외하면) 설정된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의 주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쿄 전범 재판의 피고들에게서 나타난 “무책임의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화 ‘라쇼몽’의 원작 소설을 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아쿠타가와의 단편 『라쇼몽』과 『덤불 속』을 합쳐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라쇼몽』(1915)과 『덤불 속』(1922), 2편의 단편소설입니다. 소설 『라쇼몽』에서는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황폐한 라쇼몽 누각 위에서 한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내고, 생계가 막막해진 겐닌(일종의 노비) 출신의 한 사내가 그 노파가 입은 옷을 몽땅 강탈합니다. 소설 『라쇼몽』이 영화 ‘라쇼몽’에 제공한 것은 라쇼몽이라는 장소와 그 사내뿐입니다. 그 사내가 영화에서는 부랑자로 등장합니다.

영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소설 『덤불 속』에서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각본가 하시모토 시노부가 『덤불 속』을 각본화했고, 그걸 본 구로사와가 좀 길이가 짧다고 하자 하시모토가 소설 『라쇼몽』의 도입을 제안, ‘라쇼몽’의 사내가 ‘덤불 속’의 도적이 된 것으로 설정한 각본을 새로 썼는데, 이 각본에 반대한 구로사와가 그 사내를 부랑자로 설정하고, 라쇼몽에 모인 세 사람의 대화라는 틀과 나무꾼의 살인 현장 목격담, 그리고 엔딩의 버려진 갓난아이 에피소드를 추가해서 그 자신이 다시 각본을 썼습니다.

영화 ‘라쇼몽’에 비하면 소설 『덤불 속』의 구성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작가나 서술자의 개입은 일절 없고, 오직 일곱 인물들 각각의 말이 직접화법으로 제시될 뿐입니다. 그것들은 포청에서 행해지는 나무꾼, 행각승, 나졸, 노파(사무라이의 장모), 도적 다조마루,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고, 사무라이 다케히로 각각의 진술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론 다조마루, 마사고, 다케히로 세 사람이 저마다 살인자를 자처한 진술입니다.

왜 다들 살인자를 자처하나
독자들의 가장 일차적인 반응은 진실은 뭘까, 누가 죽인 것일까, 왜 다들 자기가 죽였다고 주장할까 하는 의문들입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인물들의 진술을 직접 제시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작가가 하지 않은 설명을 영화에서는 나무꾼의 입을 빌려 감독이 한 셈입니다. 실제로 죽인 것은 도적이라고. 사무라이의 아내와 사무라이는 이기심과 허식 때문에 자기가 죽였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그뿐만 아니라 도적도 이기심과 허식 때문에 이런저런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사실 저는 구로사와가 만들어낸 나무꾼의 목격담에 약간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잡이로 유명한 도적과 엄연히 사무라이인 젊은 남자가 결투를 할 때 그 칼싸움이 개싸움 같은 엉터리가 될 리가 없습니다. 나무꾼이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검술을 모르는 그의 눈에 그렇게 보인 걸까요? 나무꾼의 목격담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서 살인자를 자처하는 세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데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 ‘라쇼몽’ 포스터. [사진 마티 출판사]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접하게 되면 영화로 인한 선입견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을 지우고 제시되는 진술들만 찬찬히 음미해보면 구로사와의 설명은 소설 『덤불 속』에 대한 가능한 해석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덤불 속』 읽기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설은 누가 죽인 건지, 진실이 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진실은 덤불 속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런 표현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세 사람 다 자기가 죽였다고 주장한다는 사실 자체이고 여기에 진실이 있는 것이지 누가 죽였는가 하는 팩트에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진실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 죽였는가 하는 팩트가 문제가 되는 소설은 추리소설입니다. 물론 『덤불 속』은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덤불 속』의 살인 사건을 합리적으로 다룬다면 작가는 아주 다른 형태의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추리소설입니다. 둘째는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세 사람 중의 하나가 범인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예컨대 범인의 주관적 시점으로 서술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는 사람의 시점으로 서술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렇게 하면 전혀 다른 모습의 소설이 나오게 됩니다.

가슴에 꽂힌 칼은 누가 뽑았나

라쇼몽(羅生門) 미니어처. [사진 위키피디아]

아쿠타가와의 『덤불 속』이 갖는 진정한 소설적 특성은 그러한 가능한 다른 서술들과 비교해볼 때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 특성에 주목하려면 우리는 덤불 속에서 발생했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 전부를 기준으로 삼고 세 사람의 진술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음미해보면 그들의 진술 속에는 사실과 거짓이 주관적 인식이라는 색깔로 잔뜩 채색된 채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그러니 한 부분이 거짓이라고 다 거짓인 것도 아니고, 또 한 부분이 사실이라고 다 사실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구별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 마구 뒤엉켜 있는 진술, 그리고 그 진술을 날것 그대로 제시하는 작가의 글쓰기 자체가 중요합니다. 진실에 대한 도저한 회의와 선택에 대한 끝없는 망설임이 이러한 글쓰기의 의미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뭔가 합리적인 의미를 찾는 데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암시적인 것은 작가가 소설의 마지막에 배치한 사무라이 혼령의 진술입니다. 그 진술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무라이의 가슴팍에 꽂힌 단도를 누군가가 와서 뽑아냈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첫 번째 진술을 한 나무꾼일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일곱 개의 진술을 직접화법으로 단지 제시하기만 했지만, 그 제시 방식에 작가의 의도나 무의식이 숨겨졌을 수도 있을까요?

성민엽 문학평론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