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판앤펀] 박지훈의 눈이 전하는 진실

2026. 2. 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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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난 뒤 영월 청령포에 가보고 싶어졌다. 온라인을 보니 벌써 많은 사람이 그 섬의 뱃길에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영화는 이미 400만 명을 극장에 모았다. 영화를 본 사람 대부분이 박지훈의 눈빛을 말한다. 그 눈빛이 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열었고 몸을 움직이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400만 홀린 소년 단종의 눈빛
AI 못 담는 섬세한 감정 표현
영화 본질 증명한 배우의 눈

단종의 비극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이야기다. 연출이 세련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극장 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울었다. 나 역시 그랬다. 박지훈이 처음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그냥 쿵하고 가슴이 울렸다. 그리고 슬픔 한 가지 감정으로만 영화 내내 끌고 나갈 것이라는, 젊은 배우에 대한 섣부른 편견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그의 세심한 눈꺼풀은 눈동자를 자세히 조절해나가며 죽음을 앞둔 속에서도 사소한 기쁨과 분노와 애틋함이라는 걸 다 표현해냈다. 그 눈빛이 담아낸 감정이 균일한 깊이를 유지하고, 단 한 번도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이게 배우인 거지. 감탄이 나왔다.

유해진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박지훈의 눈을 보는 순간 감정이 그냥 나왔다고. 수십 년 연기의 베테랑이 그 눈빛에서 감정을 끌어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듯 들렸다. 영화 속 엄홍도(유해진)는 왜 목숨을 걸고 왕을 보살폈을까. 거창한 충절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그 답을 어린 왕의 눈빛에서 찾게 해준다. 왕의 위엄도 아니고 비극의 과장도 아닌, 차마 다 숨겨지지 않는 열일곱의 두려움과 분함. 그 눈빛을 마주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이 추동된다. 그 눈빛이 엄홍도의 다정함을 깨웠고, “그놈들 손에 죽긴 정말 싫다”라고 말하는 어린 사람을 외면할 수 없어 역모로 내몰릴 두려움을 뒤로 하고 그의 시신을 거두게 만든다. 그 다정함이 500년 넘게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를 울린다.

드라마 ‘약한 영웅’의 연시은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저 배우,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돌 출신 배우치고’라는 단서가 붙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왕과 사는 남자’는 그 단서를 떼어냈다. 관객들은 눈 속에 보석을 가진 배우라고 했고, 드디어 20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주인공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눈은 감정을 전달하는 핵심이다. 배우에게 목소리가 없던 무성영화 시대, 감독들은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말이 없었기 때문에 눈빛이 전부였다. ‘잔다르크의 수난’(1928)이 대표하듯, 눈꺼풀 하나, 눈동자의 미세한 흔들림 하나가 대사 한 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전달했다. 현대의 아이트래킹 연구들도 이를 확인한다. 관객의 시선이 영화 속 얼굴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눈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에서 진실을 읽으려 한다.

AI가 생성한 얼굴에서 가장 먼저 들통나는 것도 눈이다. 인간의 눈은 무언가를 응시할 때 가만히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의지와 무관하게 미세하게 진동한다. AI는 이 무질서한 떨림을 매끄럽게 처리해 버린다. 그 결함 없는 매끄러움이 가짜임을 증명해버린다. 백 년 전 감독들이 카메라를 얼굴에 들이댄 이유와, 지금 연구자들이 딥페이크를 잡아내는 방식이 결국 한가지다. 마음이 없는 눈은, 마음이 있는 눈을 가진 관객에게 결국 들키고 만다.

박지훈의 눈이 전달하는 것은 그 생리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 눈빛이 500여년전 외롭게 죽어간 열일곱 소년과 지금 이 시대의 관객 사이에 전례 없이 단단한 공감의 끈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댓글에 썼다. 부모의 사랑도, 백성의 사랑도 받지 못했던 단종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누군가는 투박한 연출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박지훈을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좋은 연출의 절반 이상을 해낸 셈이다. 세련된 미장센이 아니라 배우의 눈빛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영화적 진실에 관객들이 투항한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시나리오의 예술이다. 하지만 결국은 배우의 연기로 완성되는 예술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는 눈빛으로 완성된다. 마음은 언제나 눈에서 먼저 열리고, 그 문을 통해 우리는 기꺼이 타인의 고통과 기쁨으로 걸어 들어간다. 배우는 그런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박지훈이 보여줬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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