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던 베를린 맞아? 어느 활동가에게 행한 야만적인 일
[고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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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대표 극장. 베를리날레 팔라스트로 불린다. |
| ⓒ 고정희 |
젊은 시절엔 표를 사기 위해 몇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릴 만큼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였다. 온라인 예매 덕에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땐 친구들과 함께 한국 영화 한 편을 보는 전통도 있었으나 이 역시 넷플릭스 덕분에 불필요해졌다. 원하면 매일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베를린영화제 열정은 식은 지 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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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관계자들과 일반 관객들 사이의 '필름톡'은 베를린영화제의 특징 중 하나다. 사람들이 필름톡에 참가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 ⓒ 고정희 |
칸이 턱시도와 화려한 드레스로 상징되는 엘리트 영화제라면,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 미학과 고급 예술에 집중하는 것이 베니스 영화제라면, 베를린 영화제는 서민을 위한 영화제로 통한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관객 중심'의 영화제이다. 물론 베를린답게 가장 정치적인 영화제이기도 하다. 논쟁하는 영화, 사회적 갈등을 스크린 위로 끌어 올리는 영화가 환영받는다.
가 보지는 못했지만 칸에서는 영화 관계자가 아니면 입장조차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베를린 영화제의 축제장에 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후줄근한 겨울옷을 입은 시민들이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부담 없이 섞여 돌아다니고 있었다. '베를리날레 팔라스트'라고 불리는 본 영화관의 거대한 유리창에 화려한 붉은 조명이 켜져 있고 바닥도 온통 선홍색으로 장식해 놓았다. 가로수도 성탄절이 다시 온 듯 반짝이는 별을 잔뜩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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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현지시간) 독일 좌익 운동가 마야 T가 극우 운동가들을 상대로 한 반파시스트 폭행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가운데 헝가리 부다페스트 법원에 출두하고 있다. |
| ⓒ 로이터 연합뉴스 |
마야 T는 2023년 부다페스트에서 당당하게 행진하는 네오나치들을 두들겨 패 중상을 입혔다.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상대가 아무리 역겨운 네오나치라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명수배를 받고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는 그가 부다페스트 법정에 서게 된 경위가 석연치 않았다.
평소 느려 터진 베를린 관료주의가 이 사건에서만큼은 특수부대 작전을 연상할 만큼 신속했다. 새벽 두 시에 베를린 구치소에서 자는 마야 T를 깨워 헬기에 태워 헝가리로 보냈다.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인도 거부 명령서를 발부했을 때 헬기는 이미 국경을 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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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일(현지시간) 독일 동부 예나에서 반파시스트 운동가 마야 T를 지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
| ⓒ AFP 연합뉴스 |
그뿐 아니다. 마야 T의 처지는 이탈리아의 활동가 일라리아 살리스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헝가리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재판받는 일라리아 살리스 모습에 온 이탈리아 전체가 분노하며 보호를 외쳤고 동료들은 기지를 발휘했다. 이탈리아는 그녀를 유럽의회 의원 후보로 지명했고 당선시켰다. 결국 살리스는 면책특권을 얻어 자유를 되찾았다.
자국민이 가혹한 환경의 외국 감옥으로 끌려가는데도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는데 어쩌겠어'라면서 쉽게 수용하고 잠잠해지는 베를린 시민들의 반응도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나치 시대를 연상시키는 검찰의 잔인한 효율성과 이를 묵인하는 차가운 침묵, 그것이 베를린의 본모습인가?
독일 현지에서 피부로 느끼는 이들의 큰 특징은 제도와 절차에 대한 무서운 수준의 순종이다. "시스템이 정한 것이니 따라야 한다"라는 확고한 믿음은 분명 제도 내에서 평등을 보장하는 큰 장점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사람보다 제도와 절차가 우위에 선다는 뜻도 된다.
나도 모르게 오래전 연방 아카이브에서 보았던 나치 시대 말단 공무원의 서류가 떠 올랐다. 명령대로 유대인을 기차에 태워 보냈다는 보고 문서였다. 아무런 감정도 전해 오지 않는 종이 한 장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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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레드 카펫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경비원 |
| ⓒ 고정희 |
영화인들이 스크린 속에서 논바이너리의 권리를 뜨겁게 옹호하여 갈채를 받을 때 정작 현실의 마야 T는 국가권력에 의해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21세기에. 그런데 광장은 왜 이리 고요한가. 이 지독한 모순이 지금 베를린이 처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기묘한 공존을 말하는 걸까?
그럼에도 광장에서 겪은 두 가지 사소한 경험은 내가 알던 베를린의 면모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앞을 지키던 한 청년 경비원은 사진 한 장 찍고 싶다는 나의 청에 기꺼이 길을 터주었다. "당신, 배우 뺨치게 잘생겼는데 레드 카펫을 지키지만 말고 그 앞에서 포즈 한번 취해보면 좋겠다"라는 농담 섞인 부탁에 그는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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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국제영화제 축제장으로 가는 길 중 하나는 아직 공사 중이다. 멀리 베를리날레 팔라스트가 보인다. |
| ⓒ 고정희 |
베를린은 지금 두 갈래로 찢겨 갈등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법과 효율의 이름으로 개인을 압살하는 차가운 권위주의가 다시 박동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저분한 공사장을 옆에 두고 예술과 인간의 존엄을 토론하는 뜨거운 민주주의가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문화예술의 영향력이 이 도시의 심장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 시대에는 오직 차갑고 잔인한 얼굴만이 존재했지만, 지금의 베를린은 국가가 인권을 외면할 때 광장에 모여 질문을 던지는 시민들이 있다.
내가 베를린을 아주 저버릴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이 도시의 미래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이유는 바로 제복 뒤에서도 미소 지을 줄 아는 그 인간적인 느슨함과 자율성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때로 우리를 배신하지만, 광장의 시민들은 여전히 깨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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