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낯선 이름, 아버지가 털어놓은 비밀

김성호 2026. 2. 1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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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277] <남쪽>

김성호 평론가

완전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워졌다고 말해지는 작품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눈썹은 지워져서 아름답다. 오랫동안 왜 모나리자에겐 눈썹이 없는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 그림은 21세기 들어 기술적 분석을 통해 실제론 있었으나 지워진 상태란 게 확인돼 충격을 던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눈썹이 있는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사람들은 눈썹이 없는 그림을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다. 외로 눈썹 없는 모나리자가 더 신비해 보이는 건 다 빈치 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테다.

제목도 따로 붙지 않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2악장 교향곡도 미완의 작품을 논할 때 빠지는 법이 없다. 31살의 나이로 죽은 천재적 작곡가 슈베르트는 통상 4악장으로 만들던 교향곡을 2악장까지만 만든 채로 눈을 감는다. 그리하여 이 곡은 흔히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이 아예 제목처럼 느껴질 정도다. 25살의 청년 시절 만들다 만 이 교향곡이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 여겨질 거라고 누가 짐작했을까. 그러나 후대의 음악 애호가들은 미완성 교향곡으로부터 완전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느끼고는 하는 것이다.

완성되지 못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성되지 않아 못난 기분을 주는가. 이소룡의 <사망유희>가 오로지 클라이맥스 액션신만 있다고 멋지지 않은가. 길버트 스튜어트가 머리만 제대로 그린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는 미국 1달러 지폐에 들어가 거의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세상사란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다.
▲ 남쪽 스틸컷
ⓒ M&M인터내셔널
완성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여기 영화사에 또 한 편의 미완의 명작이 있다. 지난 시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감독으로 지난해 한국에서 다시금 주목 받은 빅토르 에리세의 두 번째 영화다. < 남쪽 The South >이라 이름 붙은 영화는 당초 세 시간 가량의 대하드라마로 기획됐으나 현실적 이유로 촬영이 중단돼 절반 가량의 이야기만으로 완결지어졌다. 풀다 만 듯한 이야기가 본래라면 엉성하고 어설픈 실패작으로 취급될 수도 있었을 텐데, 도리어 사람들은 이를 그 자체로 완전한 감상을 안기는 이색적 작품이라 이야기하고는 하는 것이다.

<남쪽>은 에리세의 두 번째 장편이다. 스페인 북부 도시에 사는 소녀 에스트레야(이시아 볼레인 분)은 아버지를 남달리 사랑한다. 그 시절 많은 소녀들이 그렇듯, 아버지는 저의 사랑이고 이상이며 전부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온전하고 흔들림 없다. 그녀의 이해는 꼭 거기까지 닿는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세계가 확장되긴 하겠으나, 아버지와 에스트레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그녀에겐 있다. 세상 많은 사랑 받는 딸들이 그러하듯.
▲ 남쪽 스틸컷
ⓒ M&M인터내셔널
아버지의 비밀을 바라보는 어린 딸의 시선

어느 순간 에스트레야는 아버지에게 저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단 걸 깨닫는다.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세상을 인지하는 범위가 커져가고, 자연스레 아버지의 다른 면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저와 아버지의 관계만큼,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공고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남쪽' 세계에서 가진 시간들 때문이란 걸 에스트레야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버지는 평생동안 어떤 여자를 잊지 못했다. 그 사실을 에스트레야가 처음 안 건 아버지 책상 서랍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하면서다. 거기에 반복해 쓰인 이름 하나, 이레네 리오스(Irene Ríos)가 바로 그 여자란 사실을 에스트레야는 직감한다.

상상 속 인물일까, 실재하는 사람일까. 확신하지 못했던 그녀의 존재를 에스트레야는 우연히 마주한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던 길에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극장 앞에 세워져 있는 걸 보게 된 그녀다. 왜 여기 아버지 오토바이가 있는 걸까를 궁금해하며 주위를 살피던 에스트레야는 벽에 붙은 포스터에서 그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다. 이레네 리오스다.

영화 <남쪽>은 아버지가 온 세상이었던 딸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잊을 수 없는 것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며, 딸이 제 아버지를 추억하고 이해하며 닮아가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아버지가 이레네 리오스와 어떤 사연이 있었고, 지금은 또 어떠한 상태인지가 확연히 드러나진 않는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한 걸음 떨어져 아버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어린 딸의 시선으로 흘러가는데, 그녀의 인식과 이해가 아버지의 내밀한 구석까지 속속들이 닿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써 영화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애정과 호기심과 관심과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다가서는 이야기가 된다.
▲ 남쪽 스틸컷
ⓒ M&M인터내셔널
남쪽을 향한 두 가지 시선

아버지에게 그가 자랐고, 또 떠나왔던 남쪽 지방은 추억과 향수, 이뤄지지 못한 꿈이며 누릴 수 없었던 다른 삶의 선택지가 있었던 공간이다. 딸에게 남쪽은 제가 사랑하는 이를 빚어낸 미지의 세계이자 낯설지만 다가서고 싶은 곳이다. 나이든 이가 가슴에 묻은 상실과 회한, 그리고 그리움이 막 자라나는 이의 감성과 감정을 깨우는 일이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눈빛과 몸짓들로 이뤄진다. <남쪽>은 구체적인 사건보다도 인물들의 표정과 독백, 대화 아래 깔린 여백과 분위기로써 분명히 일어난 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장이 있었을 테다. 영화는 아버지에게 딸이 제가 보았고 느꼈으며 겪어냈던,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껏 짐작하지 못했을 진실을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 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훌쩍 자란 십대의 딸은 직접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얻는다. 드디어 남쪽, 아버지가 자랐고 떠나왔던 세상의 초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무엇일까. 무엇이 오늘 딸이 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아버지를 추억하게 하는 것일까. 남쪽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딸은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되었을까.

영화는 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써, 영화는 그저 그렇게 중단되고 끝맺는다. 그리하여 94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남쪽>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어쩌면 다른 영화에선 도입 정도에 불과할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본론에 돌입하기 이전에 마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를

타인에게 어떤 작품이라고 속속들이 말할 수 있는 줄거리, 극적 서사가 영화란 매체의 전부는 아니다. 전부가 아닐뿐더러, 때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종합예술인 영화는 줄거리를 가진 극인 동시에, 영상과 음향의 예술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뒤섞이고 합쳐져 빚어내는 조화로움이기도 하다.

배우와 배우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감정과 그 대화가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진실과, 그 아래 깔린 기억과 감상들이 관객과 마주 닿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가 또한 영화라는 예술의 목적이기도 하다. <남쪽>은 그와 같은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그리 흔치 않은 작품 중 하나다.

지난해와 올해, 빅토르 에리세를 한국 영화계가 다시 조명하고 있다는 건 개인적으로는 몹시 놀라운 일이다. 수입사와 배급사, 또 극장들이 갈수록 버티기 어렵다는 자조가 나오는 한 편으로 여전히 특별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찾는 관객들의 요구가 있음을 깨닫는다. 때로는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서까지, 또 때로는 시대의 주된 흐름을 거스르면서 이들은 영혼을 깨우고 마음을 일으키는 진짜 작품을 찾는다. 그와 같은 요구가 있어 빅토르 에리세 같은 진실한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어왔고 또 만들어갈 수가 있는 것일 테다. 이달 극장에 걸린 <남쪽>에 더 많은 영화팬들의 관심이 닿기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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