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내내 뱃속에 쌓인 기름기 쏙 빼주는 차 한 잔
노시은 2026. 2. 19. 08:27
[노시은 작가의 茶시간] 우수에 마시는 운남대백호와 자스민 꽃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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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로 습습함과 기름기 한번에 잡아주는 운남대백호+자스민꽃 블렌딩티 |
| ⓒ 노시은 |
산책 때마다 부쩍 자란 꽃눈의 크기를 보며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느끼는 요즘입니다. 절기상으로도 우수(雨水. 봄에 들어서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올해는 2월 19일) 즈음 내리는 비에 얼음이 녹는다고 하죠. 그럼에도 북한산 자락 그늘에서 맞는 바람은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 분명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람 끝이 묘하게 물기를 머금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겨우내 굳어있던 것은 땅만이 아니었습니다. 웅크리고 지낸 저의 몸과 마음도 뻣뻣한 언 땅과 다를 바 없었거든요. 몸 안의 얼음을 깨기 위해 진관사로 향했습니다. 종교는 없지만 설을 지나며 맞이하는 '진짜 새해'를 뭔가 경건하게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언 몸을 녹인 진관사 대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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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관사 대웅전 |
| ⓒ 노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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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관사 대웅전을 지키는 수염이 멋드러진 용 |
| ⓒ 노시은 |
가볍게 삼배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108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열 번까지는 할 만하더니 50배쯤 되니 후회가 밀려옵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정신을 모아봅니다.
사실 이미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숫자 108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요. 백 번에 다다르자 이마와 등에서 땀방울이 주르르, 비처럼 흘러내렸습니다. 108번의 절은 꽁꽁 얼었던 제 몸을 위한 해빙(解氷) 의식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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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은한 달콤함과 농축된 대추의 맛으로 따뜻하게 몸을 채워주는 대추차 |
| ⓒ 노시은 |
가쁜 숨과 후달거리는 사지를 진정시키며 찻집에 앉아 대추차를 주문했습니다. 진한 차를 한 모금 넘기니, 대추의 붉은 향과 달큰한 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108번뇌를 108배로 털어내고 난 텅 빈 속을 꽉 채워줍니다. 들쑥날쑥한 우수 즈음의 기운을 이 은은한 달콤함이 달래주는 듯하더군요.
집에 돌아와서는 냉장고를 털며 남은 명절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몸은 노곤해졌지만, 이대로 잠들면 보름달보다 더 둥글어진 제 얼굴을 보며 후회할 것이 분명해, 소화도 시킬 겸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동네 개천으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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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동안 얼었던 물이 녹아내리는 시간 |
| ⓒ 노시은 |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개천의 얼음장은 곳곳이 헐거워져 있었습니다. 얼음이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물이 졸졸졸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걸었어요. 그러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들과 딱 마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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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기심 많은 너구리. 다른 녀석들은 다 도망갔는데 이 녀석은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포동포동 귀여웠다! |
| ⓒ 노시은 |
포동포동 살이 오른 너구리 가족이었어요. 낮의 왜가리처럼 얼음 구멍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던 것 같았죠. 옛 문헌에 우수 무렵이면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으며 봄의 제사를 지낸다고 하더니, 저희 동네는 너구리들이 우당탕거리며 얼음 위를 돌아다니네요. 너구리의 통통하고 실룩거리는 뒤태를 보며 우수가 왔음을 실감했습니다.
백차와 자스민의 블렌딩, 봄이 움트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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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로 습습함과 기름기 한번에 잡아주는 운남대백호+자스민꽃 블렌딩티 |
| ⓒ 노시은작가 |
다음 날, 오후가 더 나른해지기 전에 운남대백호와 자스민 꽃을 꺼냈습니다. 어제 마신 대추차가 땅의 기운이었다면, 오늘은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봄의 향기가 필요했거든요. 명절 내내 쌓인 기름기도 빼주고요.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한 백차 잎은 마치 아직 녹지 않은 잔설 같고, 바짝 마른 자스민은 시든 꽃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물을 붓자 유리 다관 속에서 마법이 일어납니다. 하얀 찻잎이 눈 녹듯 물속에서 춤을 추며 풀어지고, 그 사이로 자스민 꽃이 다시 생명을 얻은 듯 피어났어요. 수색은 맑고 투명한 황금빛으로 물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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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남대백호+자스민꽃 블렌딩티가 뜨거운 물과 만나는 순간, 향기가 솟구치고 자스민꽃이 물속에서 피어난다 |
| ⓒ 노시은 |
찻잔을 들어 코를 대니, 향긋한 꽃내음이 훅 끼쳐옵니다. 대추차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위로의 맛이었다면, 백차와 자스민의 블렌딩은 가볍게 봄이 움트는 맛입니다. 입안에 머금자 향기가 비강을 타고 머리끝까지 퍼집니다. 자스민이 몸 안의 축축한 기운을 산뜻하게 정리해주니 우수 즈음에 마시기도 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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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씩 하나씩 빼먹고 고이 남겨뒀던 곶감 하나 |
| ⓒ 노시은 |
기름진 속을 씻어내고, 탁한 기운을 몰아냅니다. 차 한 모금 머금고, 겨우내 다 빼먹고 깊숙한 곳에 아껴뒀던 흑곶감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습니다. 쫀득하고 강렬한 달콤함을 엔진 삼아 차의 향긋함이 확 더 치솟는 기분입니다. 창밖은 아직이지만, 찻자리에는 이미 꽃이 피었습니다. 완연한 봄이 정말 코앞인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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