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ON]포스코부터 LX까지…중후장대 '기술'에 '감성엔진' 달았다

서믿음 2026. 2. 1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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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콘텐츠로 말투 바꾸는 전통 제조업
광고에서 드러난 중후장대 기업들의 생존 전략
위트와 스토리로 다가서는 전통 산업의 변화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단 굴착기 두 대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위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는 국내 1·2위 건설기계 기업인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가 합병해 출범한 'HD건설기계'를 알리기 위해 제작한 광고다. 각 사의 굴착기를 신랑과 신부로 의인화해 결혼식을 올리는 형식으로 합병 소식을 전했는데, 이 영상은 공개 약 3주 만에 조회 수 1억회를 돌파했다. 이 광고의 출발점은 1997년생 사내 직원의 제안이었다.

HD건설기계 광고. HD건설기계 인스타그램

이 장면이 주목받는 이유는 광고가 '재미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수적이고 위계적일 것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전통 제조업 기업들이 왜 이렇게까지 달라진 언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철강·정유·화학 등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 기업들은 최근 몇 년 사이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기 위한 감성 콘텐츠 경쟁에 나서고 있다. 기술력이나 실적 같은 전통적인 지표 대신, 스토리와 감정을 자극하는 광고로 기업을 알린다. 겉으로는 이미지 개선 전략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다 현실적인 위기감이 깔려 있다.

전통 제조업 기업들은 신생 IT·플랫폼 기업들과의 인재 경쟁에서 구조적인 열세를 느끼고 있다. 연봉이나 안정성만으로는 우수 인재를 끌어오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고루하고 경직된 조직'이라는 인식은 채용 시장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젊은 인재에게 선택받기 위해 기업 문화와 소통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판단이 감성 콘텐츠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LX그룹은 '엘엑씁니다'라는 광고를 통해 의도적으로 '씁니다'라는 언어유희를 활용해 반도체 소재, 물류, 건축 자재 등 계열사 사업을 위트 있게 풀어냈다. LX그룹 광고 캡처

HD건설기계 광고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회 수보다도, 젊은 직원의 아이디어가 실제 광고로 구현됐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 이벤트가 아니라, 조직 내부에서 의사결정 구조와 권한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기업들이 감성적인 언어로 말을 거는 대상은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취업 준비생과 미래의 구성원들이다. "우리도 유연하고, 재미있고, 당신의 아이디어를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낸 HD건설기계의 A씨는 "중후장대 산업의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겨내기 위한 우리의 진심이 대중에게 닿은 것 같아 큰 보람을 느낀다. 특히 기존 홍보 방식에서 벗어난 색다른 시도가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로 이어진 만큼, 앞으로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HD건설기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소통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고망간강으로 제작한 게임 속 다리우스 도끼의 실물. LCK 유튜브 캡처

이 변화는 인재 확보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술을 전달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끄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국내 프로 리그 LCK의 공식 후원사로 나서며, 게임 캐릭터가 사용하는 무기를 자사가 개발한 고망간강으로 구현해 전시했다. 현대제철은 아이돌 그룹 에스파와 협업해 충남 당진제철소에서 신곡 뮤직비디오를 촬영했고, LX그룹은 '엘엑씁니다'라는 광고를 통해 반도체 소재, 물류, 건축 자재 등 계열사 사업을 위트 있게 풀어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기술을 정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고망간강의 물성이나 반도체 소재의 공정, 물류 시스템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풀기보다, 게임·아이돌·스토리 같은 친숙한 장치를 통해 기술을 감각적으로 번역한다. 고도화된 산업 기술은 일반 소비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기업들은 이제 기술의 우수함을 설득하기보다, '느끼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에스파의 ‘더티 워크(Dirty Work)를 촬영했다. 에스파 뮤직비디오 캡처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가벼운 형식을 택한 기업들의 사업 본질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무겁다는 사실이다. LNG 선박, 반도체 소재, 철강과 에너지 산업은 국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영역이다. 기업들이 바꾸고 있는 것은 기술의 무게가 아니라, 소통의 방식이다. 산업의 핵심을 유지한 채,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만 시대에 맞게 바꾸고 있는 셈이다.

삼양그룹이 배우 박정민을 내세워 '스페셜티' 소재를 설명한 광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식품·화학·의약 바이오라는 복잡한 사업 구조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면서도, 고부가가치 기술 기업이라는 정체성은 분명히 유지했다. 감성 콘텐츠는 기술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도구가 되고 있다.

굴착기의 결혼식, 아이돌이 등장하는 제철소, 게임 속 무기로 재탄생한 철강 소재. 겉보기에는 가볍고 유쾌한 장면들이지만, 그 배경에는 전통 제조업 기업들의 치열한 생존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 기술을 이해시키기 위해, 변화한 시대의 언어로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무거운 기술을 다루는 기업들이 선택한 해법은, 기술을 덜 무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어느 산업이든 핵심은 지속가능성이다. 능력과 마인드가 뛰어난 인재가 꾸준히 유입되는 구조가 중요하다"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돈은 더 이상 유일한 선택 기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결정 포인트를 정확히 공략해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것이 관건"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기업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필수적인 시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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