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뎌온 땅, 성북동의 두 얼굴

이영천 2026. 2. 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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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 ②] 혜화문~성북동~숙정문을 통과하다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본디 문이 섰던 자리가 허공이다. 성벽도 사라지고, 그나마 능선은 깎여 나갔다. 혜화문은 동쪽 작은 문이라는 '동소문'이기도 하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성문 가운데 하나다. 일제강점기 도로 확장으로 철거(1928)되었고, 나중 지금 위치에 복원(1994)된다. 옛 자리의 높이에 맞춰 북쪽으로 살짝 옮겨 복원되었다. 문은 되돌아왔지만, 터는 허공으로 남았다.
▲ 혜화문 2월 초순 찾은 옛 문의 터에서 옆으로 높이를 맞춰 1994년 복원된 혜화문. 동쪽의 작은 문이라 해서 '동소문'으로도 불렀다.
ⓒ 이영천
성문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가르던 시대는 아니다. 왕조는 갔고, 공화정이다. 문도 더는 닫히지 않는다. 걸음을 통제하지도 않는다. 혜화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성문을 '통과한다'기보다 곁으로 '스친다'고 느낄 터이다. 복원된 문은 기능보다 기억을 소환하는 장치처럼 외따로 서 있다.

혜화문이 있던 자리를 이제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도성은 남았으되, 도시도 그처럼 성곽을 기준으로 흐르지 않는다. 성곽이 더는 시각을 가두지 않고, 도시 활동은 성곽을 비켜 간다. 이 어긋남이 현재의 도성 풍경이다.

혜화문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옛 서울시장 관사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정책임자의 거처였으나, 지금은 '도성 안내센터'로 사용 중이다. 도성 복원에 진심이던 어느 시장의 겸손한 태도가 일궈낸 변화다. 집은 좀 더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하였고, 집안의 생활이 전시 대상이 되었다. 응접실과 정원은 더는 특정인의 향유가 아니게 되었다.
▲ 도성 안내센터 옛 서울시장 관사를 故 박원순 시장의 뜻에 따라 개방하여 '도성 안내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 이영천
옛 관사를 천천히 둘러보며, 이 변화가 혜화문 복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요에 따라 기능이 변했고, 형상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에서 오래 남는 건 '용도'가 아니라 '형태'라는 사실을 이곳이 조용히 말하고 있다.

두 얼굴의 성북동

성북동은 한 방향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이곳을 먹이를 찾지 못한 비둘기가 내려앉는 가난한 동네로 그렸다. 비둘기는 날지 못한 존재라기보다, 날아갈 이유를 잃은 존재에 가까웠다. 시인은 파괴되어 가는 자연과 문명에서 소외되어 비루한 존재로 전락한 인간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시가 쓰이던 시절, 성북동은 도성 변두리의 비탈을 따라 삶이 밀려들던 자리였다. 복개된 성북천 동쪽 언덕, 비둘기들이 앉았던 자리는 재개발로 곧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도시가 이처럼 찡그린 표정 짓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성북동 시간은 한 겹이 아니다. 조선 시대부터 성북동은 왕족과 고관대작의 별서(別墅)가 즐비한 고급 주거지였다. 도성에 가깝되 소란을 피할 수 있고, 북악과 낙산 사이의 지형이 바람을 막아 주었다. 성안의 중심 권력에서 한발 비켜선 대신,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가난과 별개로 이미 선택받은 땅이었다.
▲ 성북동 멀리 언덕 위 아파트가 동소문동이고, 가까이 성벽 바깥이 북성마을이다. 중위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성북동 풍경이다. 동소문동 가까운 성북천 동쪽은 재개발 예정으로, 이 풍경도 곧 바뀔 것이다.
ⓒ 이영천
성북동 길을 걷다 보면 담장이 유난히 잦다. 낮은 담도 있고, 안이 보이지 않는 높은 담도 있다. 담장 안팎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근엄하다. 담은 경계를 만들지만, 소리까지 막지는 못한다. 이 동네에서 삶의 차이는 분리보다 외면에 가까운 '병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동네에선 빈과 부가 충돌하기보다, 서로 공간을 달리해 머문다. 어느 공간에는 비둘기가 내려앉았고, 어느 공간에는 별장이 들어섰다. 같은 골목과 같은 비탈이 전혀 다른 삶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성북동 인상이 단정하게 정리되지 않는 이유는, 이 겹쳐진 시공간 때문이다.

성곽과의 관계 또한 성북동을 규정한다. 성 안도 아니고, 성 밖이라 단정하기도 어려운 모호한 위치다. 성곽 테두리에서 벗어났었기에, 오히려 생활 밀도에 더 치중했다. 성곽은 이곳을 보호하지도, 그렇다고 배제하지도 않았다. 그 모호한 거리감 덕분에 성북동은 늘 다른 방식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성북동은 한 시대의 상징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가난의 이미지로도, 부유한 주거지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곳은 도성 바깥에서 도성의 시간을 나눠 가진 동네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시간을 견뎌온 땅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지킨 사람, 버텨낸 마을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북쪽 언덕 위, 간송미술관이 성북동의 또 다른 선택을 말없이 보여준다. 미술관은 개발이나 복원이 아니라, 지켜냄의 결행으로 나아갔다. 간송 전형필 선생을 생각한다. 전 재산을 쏟아부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이런 걸 웅지라 하는가? 끝까지 지켜낸 그 정신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풍부해졌으니 말이다.
▲ 간송미술관 성북동에 하나의 상징처럼 앉아 있는 간송미술관. 이 공간에 이런 미술관이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이영천
간송미술관은 이슬방울 같은 결정체다. 많은 문화재가 사라지던 시절, 앗기지 않겠다는 결기가 지금의 지위를 낳았다. 여기선 '보존'보다는 '항구(恒久)'라는 표현이 더 적당해 보인다. 미술관과 성북동이 묘하게 조화롭다고 느껴진다.
성곽 아래 북성마을은 도성의 일상을 떠받치던 곳이다. 도성에서 필요로 하는 장류와 옷감, 빨래, 땔감이 이곳에서 마련되었다. 도성을 떠받친 백성이 얼마나 북적거렸으면 '북정마을'이 되었을까. 이처럼 성 안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 성곽 지척의 희생이 필요했다.
▲ 북성마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안 배후지로 살아가는 마을이다. 마을에 심우장이 있다.
ⓒ 이영천
눈에 띄지 않는 노동은 늘 이런 곳에 쌓였다. 도성은 스스로 굴러가지 않았다. 경사진 둥근 골목으로 남은 마을이 비록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 부를지언정, 정감 물씬 풍기는 풍치까지는 어찌하지 못한다.
심우장이 그 사이에 있다. 일부러 도성, 특히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앉은 집이다. 우리 통념이나 편리에서 남향이 아닌 정북향이다. 올곧음이나 저항이 무엇인지를, 앉은 자세 하나가 모든 말을 하고 있다.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듯 정곡을 찌르는 집 심우장에서 만해 한용운의 미소 띤 얼굴을 본다.
▲ 심우장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도성 안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등지고 앉힌 집 심우장이다. 선생의 결기처럼 차가운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 이영천
거리나 자리로는 분명 중심에서 몇 걸음 물러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칼끝은 썩은 도성의 정곡을 겨누고 있었다. 비겁으로 도성에 들어 나라와 민족을 팔지 않았다. 도성의 높고 굵은 담장은 만해의 그런 뜻을 잘 품어 주었다. 도성과 떨어진 경계에서 응달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심우장의 든든한 울타리가 바로 한양도성이었다.

닫혔다 열린 길

와룡공원에 다다르면 지형부터 달라진다. 누운 용의 완만한 지형인 성북동이 끝나고, 백악산 급경사가 시작된다. 몸무게를 떠받치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진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잠시 숨을 고른다. 걷는다는 행위, 발과 몸뚱이의 싸움이 다시 의식된다.

삼청각은 한때 권력의 음침함이 깃들던 자리였다. 갈라진 민족의 회담이 은밀하게 논의된 장소라는 상징보다도, 술과 권력, 밤의 야합이 먼저 스치고 지나가는 곳이다. 이른바 '요정정치'의 최고봉이었다.
▲ 삼청각 북악산 능선 아래 삼청각. 지금은 식당 등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 중이나, 1970년대 독재 권력의 '요정 정치'라는 어둠의 중심이었다.
ⓒ 이영천
지금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맘껏 명성을 소비하고 있다. 기능은 바뀌었지만, 그때의 집은 그대로 남았다. 도성 밖의 이런 변화가 낯설지 않다. 무엇이 있었는지는 흐릿해졌어도,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백악산 성곽길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군사시설이라는 이유였다. 1968년 31명의 무장한 북한군이 침투한 이른바 '1·21 사태'가 산의 길을 닫게 된 계기였다. 시작은 그랬으나, 실상의 정점에는 닫힌 권력의 치부를 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게 나쁜 권력의 성곽이었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그 길을 애써 외면했다. 다시 열렸을 때, 이 길은 방어 시설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되었다. 막기 위해 쌓은 성이, 걷기 위해 열리는 순간이었다.
▲ 말바위 안내소 북악산 구간의 한양도성을 개방하면서, 신분증을 검사하던 '말바위 안내소'이다. 지금은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는다.
ⓒ 이영천
말바위에 이르면 여러 전설이 구름처럼 떠다닌다. 말이 미끄러졌다는 이야기부터, 한자 '末(끝말)'을 빌어 말바위라는 이야기까지 여럿이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겨가 한때 출입이 자유로웠다. 또 다른 권력자가 다시 백악산 아래로 집무실을 옮겨왔어도, 예전처럼 길을 걷는 이의 신분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 한양도성 숙정문 구간 중간 큰 소나무들이 우거진 곳이 숙정문이고, 그 위로 뻗은 성벽 위가 능선 셋이 만나는 '곡성' 구간이다.
ⓒ 이영천
백악산은, 그게 비록 손에 잡힐 듯 가까워도 보기보다 산세가 험하다. 굽이굽이 성벽이 휘어져 나간다. 말바위도 이처럼 험한 지형을 설명하려는 오래된 하나의 방식이라 이해한다. 지금 이곳은 말 대신 사람이 걷는다. 소나무는 울울하다. 길은 정비되었고, 닫힘은 이야기로 남았다.

혜화문에서 시작한 오늘의 걸음을 숙정문 앞 백악산 자락에서 멈춘다. 성곽은 여러 차례 허물어졌고, 잘리고, 다시 쌓였다. 그 과정마다 도성에 살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지켜냈고, 또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다는 건, 그 선택이 남긴 자리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느끼는 일이다. 시간을 데리고 온 성곽에 낀 이끼가 겨울 추위에 푸르게 말라붙었다.

- 다음 화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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