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닭장차에 실려 가는 수모도 마다치 않았던 영부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2. 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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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청와대 나온 뒤 세상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던 공덕귀 여사

[김종성 기자]

 1960년 10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정부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내외와 장면 국무총리 내외. 왼쪽에서 두번째가 공덕귀 여사.
ⓒ 연합뉴스
프란체스카-공덕귀-육영수-홍기-이순자-김옥숙 등으로 이어지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에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름이 있다. 유일하게 실권 없는 의원내각제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공덕귀다. 윤보선 대통령이 아닌 장면 총리가 실권자였기 때문에, 윤보선의 부인인 그를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로 볼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남편이 대통령을 그만둔 뒤에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여성노동운동이었다. 또 민주화 투쟁도 벌였다. 현대 한국의 핵심 과제에 두루 참여했던 것이다. 그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에서 이례적인 인물이다.

공덕귀는 처음에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1911년 5월 19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닌 그는 10대 때부터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이것이 전도사 직업으로 이어졌다.

그가 열일곱 살 때인 1928년에 인도 마드라스에서 세계기독교학생연맹(WSCF) 총회가 열렸다. 이때 인도 기독교인들은 이 대회의 새벽예배를 이끈 수피아여학교 교감 김필례에게 감동을 받았다. 김명구 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장이 쓴 <공덕귀>에 따르면, 인도인들은 "영국 사람의 선교는 받고 싶지 않지만, 한국 사람이 오면 선교를 받겠다"라며 한국인 선교사 파송을 희망했다.

인도인들은 영국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전개된 영국 교회의 선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들이 한국인을 원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공덕귀가 꿈을 꾸게 됐던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영국 식민지 인도에 동병상련을 품었다. 그런 한국인들을 상대로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1929년 4월 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릴 '조선에 부탁'을 선사했다. '동방의 등불'로 알려진 이 시는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빗나든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 되리라"라는 예언을 담았다.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투쟁에 투신

공덕귀는 통영공립보통학교와 동래 일신여학교(동래여고)를 졸업한 뒤인 1937년에 26세 나이로 요코하마 교리츠신학교에 입학해 1940년에 졸업했다. 그런 뒤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이라 인도에 가기는 힘들었다. 1943년에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난 그는 이듬해에 김천으로 복귀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전임강사가 됐다.

윤보선과 결혼한 것은 38세 때인 1949년이다. 두 딸을 둔 14세 연상의 이혼남인 윤보선을 공덕귀와 연결시킨 사람들은 윤보선 가문과 서울 교인들이다. 기독교를 믿은 이 명문대가는 그 당시 서울 정동의 덕수교회 전도사로 있는 공덕귀에 관한 소문을 듣고 '조직적 공작'을 벌였다. 위 <공덕귀>에 따르면, 이 집안은 주기적으로 덕수교회에 사람들을 보내 공덕귀를 탐문했다. "윤보선도 공덕귀를 보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공덕귀는 결혼을 원치 않았다. 중매가 들어왔을 때도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는 빈말이 아니었다. 이때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이 나서서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위 전기에 따르면 "프린스턴대학 입학서류를 들고 지방으로 피해"버린 교인도 있었다. 결국 "시간을 놓친 공덕귀는 유학을 포기"했다. 1949년 1월 6일, 그는 윤보선의 안국동 대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타고르의 나라에 가겠다는 꿈은 이로써 깨지게 됐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그의 남편은 1952년에 이승만이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사실상의 내란을 일으키자 그 진영에서 이탈했다. 그런 뒤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의 지도자 길을 걷다가 4·19혁명 4개월 뒤인 1960년 8월 12일에 대통령이 됐다. 민주당 구파 지도자로서 신파인 장면 내각과 동거하게 된 그는 1961년 5월 16일부터는 군사정권과 어색한 동거를 했다.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은 1962년 3월 22일이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974년, 공덕귀는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공안조작 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그 계기였다. 이는 그의 남편이 배후 조종 혐의를 받고 불구속 재판에 넘겨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독교 탄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박 정권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 민청학련과 함께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몰아갔다. 그해 4월 25일 자 <경향신문>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간사인 이직형·정상복·안재웅·서경석·이광일 등은 민청학련 주모자인 이철·나병식·황인성 등이 추진하던 정부전복 기도 음모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는 중앙정보부의 수사 결과를 실었다.

공덕귀는 1972년에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서울연합회장이 됐고, 1974년 2월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대표해 도쿄 국제여성평화회의에 참석했다. 그가 기독교 지도자 반열에 올랐을 때 발생한 박 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그를 반독재 투쟁으로 이끄는 촉매제가 됐다.

그의 싸움은 기독교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해 9월, 그는 구속자가족협의회장이 되어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시국사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시민문화 춘추> 2023년 제35호에 실린 위 김명구의 논문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공덕귀의 역할'은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쉴 사이 없이 다녔고 박정희 정부에 저항했다"고 한 뒤 "1976년 한국양심수가족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후, 이 조직은 핵심 저항단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위한다는 심정으로
 1997년 11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 "민주-인권수호 앞장 선 '여성운동의 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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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성 노동자들과도 연대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발행된 1997년 11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말한다.

"캄캄한 정치상황 속에서 허허롭게 '어제의 영부인'이라는 겉옷을 벗어던진 공 여사는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위원, YH대책위원회 위원 등으로 동분서주하는 등 우리 사회의 춥고 어둡고 사랑이 필요한 곳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가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66세 때인 1977년 5월 7일이었다. 여성 내의를 생산하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남영나일론에서 여성 노동자 약 800명이 임금체계 합리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개시했다. 잘 해결하겠다는 노조 지부장의 약속을 받고 농성을 풀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중 200명이 투쟁을 재개했다. 그러자 사측은 "미친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든 남자 노동자 약 250명을 동원해 여성 노동자들을 구타했다. 이 사건으로 입건된 쪽은 여성들이다.

위 전기에 따르면, 공덕귀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 자격으로 6개 단체의 협력을 끌어내는 한편, 집단농성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 11명이 연합회의 생활비 지원을 받도록 배려했다. 또 남영나일론 사장에게 건의문 형식의 글을 보냈다.

"구류처분을 받았던 11명의 여성 근로자들을 즉각 무조건 복직시킬 것. 만약 이러한 저희들의 요구가 이행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여성단체와 여대생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것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형식은 건의문이지만, 실상은 경고문 비슷했다. 결국 사장은 구타 행위를 사과하고 해고 노동자의 복직을 약속했다. 일간지에 사과문도 게재했다.

위의 부고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투쟁 활동으로 인해 공덕귀는 전직 대통령 부인에 어울리지 않는 경험도 많이 했다. 그의 남편이 "이 나라는 지금 무(無)헌법 상태"라는 시국 성명을 발표한 1975년 3월 1일이었다. 기자회견 장소로 예정된 서울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경찰 넷이 그의 팔다리를 각각 번쩍 들어 차에 태우는 일도 있었다. 다음날 <조선일보>는 "사복 4명이 공씨를 번쩍 들어서 서울1나7019호 찝에 태워 강제 귀가시켰다"고 보도했다.

4·19혁명 직후에 대통령 부인이 됐다가 2년 뒤 청와대를 나온 공덕귀는 한국 민주주의가 한층 더한 암흑에 빠지자 최일선에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신앙의 길이었다. 위 김명구 논문에 따르면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 인간의 투쟁이 유린되는 곳에서 하나님도 역시 고통을 당하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공덕귀는 인간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위한다는 심정으로 유신독재세력과 싸웠다. 그의 민주화운동·노동운동·여성운동은 신앙과 일체가 됐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뒤에 세상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퍼스트레이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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