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산 청벽계에 올라 알게 된 것

이상기 2026. 2. 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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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의 고장 윈난성에 가다 ⑨] 숭성사와 창산 청벽계

지난 1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일주일 동안 중국 윈난성의 자연 유산과 문화유산을 탐사했다. 강의 협곡과 길을 따라 차마고도가 형성되어 있고, 옛길 주변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와 문화유산이 잘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 차마고도 지역 소수민족이 남긴 문화와 예술, 티베트 불교의 특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인천에서 윈난성 성도 쿤밍으로 들어가 따리, 리장, 샹그릴라를 답사하고 쿤밍으로 나왔다. <기자말>

[이상기 기자]

숭성사는 관음성지다
 숭성사 11면관음상
ⓒ 이상기
숭성사에는 관음보살을 모시는 세 개의 전각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아차야관음각 외에 11면관음전과 우동관음전이 있다. 이것은 윈난과 티베트 지역에 관음신앙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11면관음전에는 9m 높이의 11면관음 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4m 높이의 관음 8화신(化身) 입상과 좌상이 도열해 있다. 이들의 명호에서 보타락가, 구고구난(救苦救難), 심성구고(尋聲救苦), 제원보(除怨報) 등을 볼 수 있다. 보타락가는 해수관음으로 바람과 풍랑을 막아준다. 또 다른 관음은 중생을 고난으로부터 구해주고 원한을 제거해 준다.

그런데 11면 관음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11면, 팔이 양쪽으로 8수씩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들 얼굴 역시 설법하는 모습, 자비로운 모습, 화난 모습, 기쁜 모습, 슬픈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수인도 선정인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합장한 두 쌍의 손과 시무외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5쌍 손에는 지물이 들려 있다. 이들이 들고 있는 것은 법륜 염주 정병 화살 연꽃이다. 세상의 소리를 보는 관세음보살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은혜가 이렇게나 크다. 숭성사 관음상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으로 허리가 날렵하고 육감적인 편이다.
 숭성사 우동관음상
ⓒ 이상기
또 하나의 관음상이 산문 밖 우동관음전(雨銅觀音殿)에 모셔져 있다. 우동관음은 남조국 마지막 왕 때인 899년 조성되었다가 1999년 다시 복원되어 전각에 안치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조성 당시의 이야기가 <남조야사>(南詔野史)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0m나 되는 관음보살을 조성하려다 보니 청동이 부족하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청동비(銅雨)가 내려 이것으로 관음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높이가 3장(丈: 9m)이나 되는 금동관음보살입상으로 만들어졌다. 보관을 쓰고 귀걸이를 하고 영락과 장식으로 치장했다. 허리가 잘록하고 맨발이며 왼손에 감로병을 들고 있다.

청나라 함풍제 때 전각이 불타면서 관음상이 훼손되었고, 광서제 때인 1896년 훼손된 부분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파괴되어 제련소로 들어갔다. 우동관음이 새로 만들어진 것은 1999년이다.

2.2m의 백옥 수미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1.8m의 금동연화좌를 만든 다음, 8.6m의 금도금 우동관음입상을 안치했다. 우동관음상 좌우에는 좀 더 작은 규모의 범승(梵僧)관음, 부석(負石)관음, 수월(水月)관음, 아차야관음이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도 만나고 포대화상도 만나고
 숭성사 500나한들의 표정
ⓒ 이상기
11면관음전의 남쪽과 북쪽에는 나한당과 천불전이 있다. 나한당 입구에는 대승금강(大勝金剛)이 지키고 있다. 그는 분노한 얼굴로 좌우 6개씩 12개의 손에 금강저, 마니주(摩尼珠), 연꽃, 밧줄, 방울, 지혜의 칼, 법륜 등을 들고 있다.

그는 말법시대에 재난과 화를 잠재우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중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높이 1.8m 내외의 오백나한 금동조각상이 전각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자리 배치도 그렇고 표정도 아주 자연스럽다. 나한상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나한당 아래로는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 한가운데 미륵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뒤를 위태보살이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포대화상(布袋和尙)을 미륵불의 현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 남쪽의 절에는 미륵전에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다. 미륵불 양쪽에는 팔부신중이 지키고 있다. 팔부신중은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파(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楼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呼羅迦)다. 이들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남조건극대종루: 종루 너머로 숭성사 삼탑 중 천심탑이 보인다.
ⓒ 이상기
산문을 나와 우동관음전을 지나면 남조건극대종루(南詔建極大鐘樓)에 이르게 된다. 이 종루에는 남조국시대인 871년 만들어진 윈난성에서 가장 큰 종이 걸려 있었다. 명나라 말기인 1639년 서하객은 따리를 방문해 얼하이와 창산을 유람했다.

이때 창산의 청벽계(清碧溪), 감통사(感通寺), 숭성사를 방문하고 <따리 유람일기>(游大理日記)를 남겼다. 그곳에 "종이 지극히 커서 지름이 3m가 넘으며, 그 두께가 30㎝에 이른다. 그 소리가 가히 80리까지 들린다"고 썼다. 이 종은 숭성사 5대 보물 중 하나로 중시되었으나 청나라 말 전란으로 파괴되었다.

1997년 종루가 만들어졌고,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베이징 고종(古鐘)박물관에서 설계하고 난징 신광(晨光)주조에서 대종이 제작되었다. 종의 높이가 3.86m, 지름이 2.14m, 무게가 16.3t이라고 한다. 종의 상층부에는 6폭의 바라밀도(波羅密圖)가, 하층부에는 6폭의 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그러나 문이 닫혀 종의 형태와 조각을 확인할 수 없다. 종루 너머로는 숭성사 삼탑 중 천심탑이 석양에 밝게 빛나고 있다. 숭성사는 창산을 배경으로 동향하고 있어 오전 중에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오후에는 탑과 전각 등이 역광이 되어 좋은 사진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창산 청벽계
 창산에서 만난 푸얼 커피
ⓒ 이상기
우리는 이제 서하객이 방문했던 청벽계와 감통사를 찾아간다. 청벽계에 단시간에 오르기 위해서는 감통사 아래에서 출발하는 창산감통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 좋다. 우리는 숭성사를 제대로 살펴보았기 때문에, 감통사는 생략하고 바로 청벽계로 오르기로 한다.

시간 여유가 있어 케이블카를 기다리며 정거장 카페에서 잠시 쉬어간다. 카페는 1988년 윈난 지역에서 최초로 커피농장을 운영한 야압당하곡(野鴨塘河谷) 농장의 원두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농장은 푸얼(普洱)시 최남단 난핑진(南屛鎭) 대개하촌(大開河村) 좁고 긴 골짜기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아열대성 기후를 가진 지역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습도가 높으며 온도가 적정해 커피나무 재배지로 적절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친환경적으로 재배하고 생산한 커피 원두가 중국 전역으로 유통된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 커피 생산량의 65%를 푸얼 커피가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인민정부가 정책적으로 1988년 이 지역에 커피 생산과 상품기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푸얼하면 보이차 생산지로 알고 있지만, 일부 농가에서는 차 대신 커피를 생산하고 있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청벽계
ⓒ 이상기
커피 공부를 마친 다음 케이블카를 타고 창산을 향해 올라간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청벽계가 내려다보인다. 청벽계 옆으로 커다란 바둑판이 보이고, 청벽계 골짜기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청벽계로 폭포가 떨어진다고 하는데, 겨울이라 수량이 적어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길은 세 갈래다. 바둑판 쪽, 청벽계 쪽, 감통다실 쪽이다. 우리는 진롱(珍瓏) 바둑판을 본 다음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청벽계를 보기로 한다.
이곳에 이처럼 커다란 바둑판이 만들어진 것은 가까운 곳에 바둑 명인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벽계의 원래 이름이 청룡담(靑龍潭)으로, 이곳에 작은 청룡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용담 아래에는 뇌음사(雷音寺)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데, 노승이 바둑 두기를 즐겨 했다. 그래서 작은 청룡은 가끔 젊은이로 변신해 노승과 바둑을 두곤 했다. 어느 날 젊은이는 바둑에 심취해 밤늦게까지 바둑을 두게 되었다.
 창산 청벽계 진롱바둑판
ⓒ 이상기
이에 노승은 젊은이에게 하룻밤 자고 갈 것을 권했다. 젊은이가 집에 가야 한다고 고집하자, 화가 난 노승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젊은이는 마지 못해 용으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승은 용을 보자 공포에 질려 죽었고, 자신의 정체가 인간에게 밝혀졌기 때문에 용은 더 이상 인간으로 변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용은 울부짖으며 꼬리를 흔들어 뇌음사를 파괴했다. 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고, 용은 그 물살을 따라 얼하이 호수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기려 용담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위쪽 바위에 우혈(雨穴)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 태수로 부임한 양공(楊邛)이 비우(雨) 자를 임금우(禹) 자로 바꿨다고 한다. 청벽계는 상중하 세 개의 연못(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담이 청색, 중담이 남색, 상담이 녹색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수량이 많을 때 삼단을 이루며 떨어진다. 그러나 겨울은 갈수기여서 중담 위에서만 가늘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청벽계에는 시인묵객들이 써 놓은 마애석각(摩崖石刻)이 여럿 있다.
 청룡담의 관세음보살상과 청벽계(淸碧溪) 석각
ⓒ 이상기
현대의 서화가(書畫家)인 슈베이홍(徐悲鴻)도 이곳 청벽계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묘향국에서 걸식하면서 청벽계에서 혼을 쏙 뺏겼다(乞食妙香國 鎻魂清碧溪)" 묘향국은 따리국의 옛 이름이고, 청벽계는 창산 마룡봉 아래 깊고 푸른 골짜기다. 슈베이홍은 47세 되던 1942년 따리에서 서화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시간을 내서 따리 지역의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다녔다. 따리 고성, 숭성사, 창산, 얼하이를 방문했을 것이다. 그중 창산 청벽계를 방문하고 남긴 시가 청벽계 상담에 석각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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