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지상주의 저격하는 한국형 로맨스, 세계에 통할까?
[김성호 평론가]
한국 멜로에도 전성시대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쯤 된 일이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 <편지> <미술관 옆 동물원> <시월애> 등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작품들이 줄줄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최진실, 심은하, 전도연, 전지현 등의 스타가 줄줄이 등장하던 시절. 시간이 흘러 2000년대 초가 되어서도 이 같은 흐름이 아주 끊이지는 않았다. 손예진이 주연한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작품들이 그래도 한국영화 안에 사랑이란 코드가 아직은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했으니까.
그 시절, 그러니까 남녀는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사회 안엔 그래도 낭만이랄 것이 남아 있던 때에는 한국영화 가운데 굵직한 줄기로써 로맨스가 자리했다. 그러나 오늘은? 하하하. 그저 웃고 넘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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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그러나 어디 그렇기만 할까. 고전 중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담고 있는 진실 한 가지는 저를 둘러싼 온 세계가 가로막아도 청춘 남녀의 사랑은 피어난다는 것이 아니던가. 어디 가문의 반대만일까. 시대가 사랑 따윈 가치 없다 말할지라도 때가 되면 사랑은 들꽃처럼 일어나게 마련인 것을. 오랫동안 극장가에서 씨가 마른 듯했던 로맨스가 하나둘 다시 존재감을 확인하게 하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관객수 200만 명을 돌파한 <만약에 우리>의 선전 속에서, 또 한 편의 영화가 이 시대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특히 문학 애호가들에게 기대작일 <파반느> 이야기다.
<파반느>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탈주> 등을 감독하며 조금씩 제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이종필 감독의 신작이다. 2009년 출간된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삼았다. 근 몇 년 줄곧 일본이나 대만 원작을 한국화하기 급급했던 로맨스영화 시장에서 한국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등장했단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공감, 감수성, 소수자성 등의 키워드가 지배했던 21세기 한국문학의 흐름 가운데서 독자적인 색채를 가졌던 박민규의 작품이 언제고 영화화되리라 보는 이가 많았다. 2014년 영화화를 위한 계약이 체결됐단 소식이 들려왔고, 고아성은 일찌감치 여주인공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듬해 한국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박민규 작가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의혹과 인정 및 사과가 없었다면 제작이 조금 더 빨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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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10년의 시간은 많은 걸 바꿔놓았다. 갓 열렸던 스마트폰 세상은 어느덧 온 세상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로 탈바꿈시켜놓았다. 극장이 아닌 OTT 서비스를 통해 안방에서 최신 영화를 보게 되리란 걸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까.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이 인류, 또 문명을 어디로 데려갈지도 우리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건 그저 기술만이 아니다. 삶이, 사고가, 문화까지 바뀌었다. 영화 <파반느>, 또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졌다. 상록(문상민 분)은 사생아다.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스타지만 사실혼 관계인 아내며 자식을 사실상 내버렸다. 화려한 여성과 새 살림을 차리고 자랑스레 TV에까지 출연한다. 상록과 그 어머니의 존재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화려한 것, 보여지는 데만 신경쓰는 것들을 상록은 좀처럼 참아내지 못한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상록은 미정(고아성 분)과 만난다. 아는 사람은 알겠으나 백화점이란 공간은 고객이 마주하는 곳이 전부가 아니다. 그 뒤엔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전혀 화려하고 깨끗하지 않은 공간들이 있다. 미정이 일하는 곳이 꼭 그와 같다. 컴컴한 지하실, 물건이 산처럼 쌓인 그곳에서 필요하다는 것들을 챙겨 올려보내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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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반느 스틸컷 |
| ⓒ 넷플릭스 |
영화는 상록과 미정의 만남부터 그들 사이에 피어나는 특별한 관계를 뒤따른다. 누가 보아도 화려한 외모의 상록과 달리 미정은 심각한 못난이다. 그 외모가 두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상록에겐 친해지려 접근하고, 미정은 슬슬 피한다. 그저 피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무시하고, 공공연히 괴롭히는 이들까지 있다. 가만히만 있어도 '까고 싶게 생겼다'거나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삶이란 오죽할까. 그 상시적 차별과 폭력 앞에서 미정은 갈수록 숨어드는 것이다. 대응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상록은 그러면 그럴수록 미정에게 끌린다. 모두가 치장하고 화려함을 쫓는 세상, 그리고 그와 같은 경향이 더욱 선명한 백화점 가운데서 오로지 미정만이 다르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세상 전체가 따돌리는 듯한 미정의 상황으로부터 제 엄마와 저 자신의 지난 시간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혈기 넘치는 상록에겐 그 모든 시선을 넘어 미정에게 다가설 용기가 있다. 그런 용기가 요한(변요한 분) 같은 이의 도움까지 만나 그는 조금씩 미정과 마음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요컨대 <파반느>는 외모, 또 보여지는 것에 대한 흔한 태도에 대한 영화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또 다정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살아가며 심할 만큼 추한 외양을 가진 사람을, 그가 받는 일상적 취급을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속 미정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저렇게까지 심한 일이 있을까 싶을 수도 있겠으나 세상은 영화보다도 잔혹하다. 미정처럼 면접을 거쳐 좋은 일자리를 얻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공공연한 차별과 거의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혐오를 차마 견디지 못하여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는 세상으로 벗어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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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반느 포스터 |
| ⓒ 넷플릭스 |
소설이 발표된 시기, 한국에선 성형수술을 통해 못난 외모가 화려하게 바뀌는 프로그램을 무려 방송으로 내보낼 만큼 외모지상주의가 일반화돼 있었다. 의료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하면서까지 추한 것에 대한 공포며 아름다움에 따르는 혜택을 극대해 조장하는 광고를 어디서나 무차별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예 피하기가 어려울 정도. 이토록 비정상적인 상황임에도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은 도리어 무감해지니, 한국사회 속에서 외모지상주의의 토양이 그렇게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반느>엔 한국의 지나온 시간이 담겨 있다. 일부 각색을 거쳤으나 10여 년 전 한국사회의 흔한 향취가 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짙게 묻어난다. 광고, 그러니까 보기 좋게 치장한 것들의 범람은 오로지 미정이 즐겨 듣는 클래식 라디오 주파수에서만 피할 수가 있는 듯하다. 영화 가운데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대비는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치장에 신경 쓰지 않는, 본질을 가꾸는 사람들과 공간들이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발한다.
영화는 생각하게 한다. 외모와 꾸밈, 남들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과 그를 추종하며 사는 행태에 대하여 우리가 취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사는 대로 사느라 미처 차분히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우리의 생각과 가치, 사회적 시선 또한 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파반느> 속 세상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며 묻는다. 세상은 정말 진보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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