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라" 2026년에도 유효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찰
[김상목 기자]
일본의 동쪽 끝, 마을을 습격한 재앙신을 물리친 소년 '아시타카'는 저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난다. 아득히 먼 지방에 도착한 그는 들개 무리의 습격으로 절벽에서 추락한 소몰이꾼을 구하고, 그가 사는 타타라 마을에 머물게 된다. 아시타카는 주민들에게 들개와 함께 생활하는 '모노노케 히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품는다.
타타라의 지도자 '에보시 고젠'을 만난 아시타카는 마을에 깊은 인상을 받지만, 태고의 숲을 파괴하는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에보시는 숲의 수호자인 사슴 신을 쓰러뜨리고 산을 인간의 것으로 확보하고자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와 동물 신들은 여기에 저항하며 고대의 영물들과 인간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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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노노케 히메> 스틸 |
| ⓒ 대원미디어 |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로 자신의 이름을 건 장편 애니메이션을 처음 선보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에 선보인 작가의 세계관을 더욱 확장하려 했다. 영화와 병행한 만화 버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0여 년간 단행본 7권이란 방대한 분량으로 완결된다. 코믹스 결말은 우리가 아는 애니메이션과 퍽 달랐다. 두 개의 '나우시카' 사이 작가의 시선은 어떻게 변한 걸까? 그 질문은 3년 후 풀린다. <모노노케 히메>는 코믹스의 결론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즉, <모노노케 히메>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로부터 시작된 지브리 황금기 1차 결산인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란 거장의 작품 세계 역시 집대성한 작업인 셈이다. 지브리 작품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소박한 공동체주의와 환경오염에 대한 근심, 전쟁과 독재에 대한 거부감 등이 완결형으로 농축된 상태다. 그래서 사실상 은퇴 작품이라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물론 이후로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음에도 이 해석은 힘을 잃지 않는다.
근현대 일본 주류 경향과 모든 면에서 대척점
원래 제목으로 감독이 점찍은 건 '아시타카 전기'였다. '어른의 사정' 탓에 현재 명칭이 되긴 했으나, 보고 나면 원래 작명이 본질에 가깝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마치 고대 신화에 등장할 위대한 영웅 일대기라 해도 좋을 내용 때문이다. 아시타카는 위대하고 고결한 위업(괴물 퇴치) 때문에 오히려 저주에 휩싸이고, 이를 풀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그릇된 세상의 질서를 조금이나마 바로잡는다. 아름답고 고결한 반려를 만나 전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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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노노케 히메> 스틸 |
| ⓒ 대원미디어 |
그 에미시 영웅을 주역으로 내세우고, 인간에게 버림받아 들개 신에게 거둬진 '모노노케 히메'를 파트너로 설정한 것부터 현재 일본 주류 세계관과 어긋난다. 게다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동화 대상으로 취급되는 '아이누' 신화가 아시타카와 '산'(모노케 히메의 원래 이름)의 관계 기원이기도 하다. 민족의 시조가 들개와 결합한 인간 영웅이란 신화는 애니메이션의 기본 줄거리 축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카무이'란 호칭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의 존재를 존칭하는 아이누 세계관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일본이 감행한 소수민족 배제와 차별, 강제 동화정책에서 말살 대상인 고대 소수민족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현대 일본이 추구한 패권과 물질문명에 대한 대척점으로 자연 친화 지향을 전면에 세운 작업은 고전적 신화 서사에 생태론적 환경 보호 가치를 입힌다. 게다가 한국과 함께 단일민족 유독 강조하는 일본 주류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인공을 내세운 데 이르면, 창작자의 결기를 체감할 수밖에 없다. 기존 지브리 작품에서도 친환경/소수자 옹호는 짙지만, 유독 <모노노케 히메>가 종합판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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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노노케 히메> 스틸 |
| ⓒ 대원미디어 |
숲을 베고 불태우는 인간에 대한 반감은 같아도 대처법은 제각각이다. 멧돼지들은 정면으로 대결해 인간을 물리치려 하지만, 성성이들은 폐허에 나무를 심으며 소극적으로 저항할 뿐이다. 들개 모로 일족은 게릴라전을 펼치지만, 인간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진 않고, 숲의 수호자 사슴 신은 숲이 파괴되어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 다양성을 통해 자연이라 해서 단일한 집단군이 아님을 해설한다.
인간 역시 획일화하지 않는다. 에보시를 수령으로 한 타타라 마을이 그 입체감을 상징하는데, 전국 시대 전쟁과 약탈이 일상이던 당대 일본에서 고향을 잃은 유민, 유곽에 팔려온 노예 여성, 심지어 오늘날도 천대받는 한센병 환자까지 거둬들여 성 평등 공동체를 이룬 곳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알린 <미래소년 코난> 속 목가적 생태 공동체의 실제 역사적 모델 같은 공간이다. 이들은 제철과 총포 생산으로 자립을 유지하지만, 무사 집단이 호시탐탐 황금알 낳는 거위 같은 타타라를 공격하고, 이에 맞선 항쟁을 거듭하는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산속 요새 같은 마을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기에 외부에서 물자를 가져와야 하고, 노동력을 계속 공급받아야 유지될 수 있다. 그들이 교역하려면 산의 광석을 채굴하고 용광로를 가동해야 한다. 즉 생존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끝없이 산을 파괴하고 숲을 베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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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노노케 히메> 스틸 |
| ⓒ 대원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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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노노케 히메> 스틸 |
| ⓒ 대원미디어 |
청소년 시절에 처음 본 작품을 접한 이들이 자녀와 함께 재관람하는 시절이지만, 영화가 선보인 핵심 주제와 가치는 마치 숙성되듯 더욱 빛난다. 극단적 대립과 타자의 배제가 당연한 현실론인 양 득세하는 2026년에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유효하고 절실한 시각을 제공한다. 그만큼 작가가 근심하던 파괴적 방향이 21세기 들어 가속화되고, 사회 구성원의 정신을 길들인 탓이다. 이를 걱정하는 이들에겐 <모노노케 히메>에 담긴 정신은 교재와 같다.
영화 한 편 재미나게 보는 데 뭘 이리 따질 게 많냐고, 그렇지 않아도 살기 팍팍한 세상에 숨 좀 쉬자고 항변할 이들도 제법 등판할 법하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의 반영이고, 예술가는 어떤 식으로건 창작을 통해 세상을 향한 입장과 통찰을 표현하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모노노케 히메>와 그 영향력 아래 작품(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시리즈는 실사판에 가깝다) 공통의 화두는 이제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감행하는 사투처럼 우리가 치러야 할 현실의 것이다.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지게 만드는,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 작품.
<작품정보>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姫
Princess Mononoke
1997 일본 애니메이션, 다크 판타지
2026.02.18. (재)개봉 133분 전체관람가
감독/각본/원작 미야자키 하야오
음악 히사이시 조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수입 대원미디어
배급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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