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반역의 이중주 '황사영 백서'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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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론성지 토굴 속에 전시된 황사영 백서. 원본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있다. |
| ⓒ 이봉수 |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왕조 시대에는 국가가 금압하는 종교를 믿거나 선교활동을 하다가 혹독한 탄압을 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우리의 경우도 신라 초기나 조선초기의 불교탄압과 조선 후기의 천주교 탄압은 대표적인 종교박해로서 순교사에 피로 얼룩진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국가가 종교를 일방적으로 탄압하는 사례이다. 국가가 정교(政敎)를 장악하면서 종교를 정치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도하거나 이를 믿다가는 수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조선 말기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조선후기에 벌어진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은 단순히 보면 국가권력에 의한 천주교도의 탄압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국가권력을 부정하는 종교의 도전이었다. 이 사건은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순교에 해당하고, 국가의 입장에서는 배족의 행위가 된다. 신앙과 국가간의 대표적 충돌사건인 〈황사영백서〉사건을 계기로 이후 조정은 더욱 가혹하게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문헌 하나가 '필화사건' 이상으로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었다.
초기 조선천주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 은거하였다. 천주교에 비교적 유화적이었던 정조가 죽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여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임금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계의 주도 세력이 시파(時派)에서 벽파(僻派)로 바뀌었다.
새로 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천주교를 "부모도 모르고 군주도 모르는 (無父無君) 멸륜지교(滅倫之敎)"로 규정하면서 박해령을 내리고 전국의 천주교도 체포에 나섰다. 이른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수많은 교도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은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교회의 지도적 평신도들이 대부분이다. 주문모는 피신하였다가 얼마 뒤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효수되어 순교자의 길을 택하였다.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김완숙, 최필공, 홍교만, 김진숙, 홍낙민 등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붙잡혀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정조의 서제(庶弟)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 등 왕족도 사사 당하고, 지방에서도 수많은 지도급 천주교인들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면서 최초로 가해진 대대적인 박해였다. 살아남은 신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깊은 산중이나 벽지로 숨어들었다. 황사영도 체포령이 내려지자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숨었다.
황사영이 배론의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은거하고 있을 때 어느날 신앙의 동지 황심(黃心)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천주교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책을 논의하게 되고, 황사영은 이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흰 비단에 꼼꼼히 기록하였다. 조선정부의 참혹한 탄압상과 천주교 재건 방안을 적어서 중국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황사영은 1775년 강화도에서 한림학사 황석범(黃錫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다산 정약용의 조카딸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丁若鍾)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면서 관직 진출을 단념하였다. 20세 때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그의 측근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로 거처를 옮겨 서울지역의 지도적 인물로 활약하다가 신유박해를 맞아 충청도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백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백서는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95~127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황심과 신도 옥천희(玉千禧)를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옥천희가 9월 20일(음력) 체포되고, 뒤이어 황심도 체포되면서 백서는 압수되고, 황사영도 9월 29일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대역무도죄로 11월 5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사당하고 부모와 처자, 일가친척이 모두 귀양가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백서는 원본이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고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G, E, 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순교 복자 79위(位)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 이후 한국천주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해 간략한 설명에 이어 신유박해의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약력을 소개한데 이어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순교의 과정을 상세하게 적었다.
특히 문제가 된 부문은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는 방안에 대한 언급이었다.
황사영은 이 대목에서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으로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서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경제적으로 무력하므로 서양제국에 호소하여 성교홍통(聖敎弘通)의 자본을 얻고 자 한다.
② 북경 성당과 조선천주교 신도와의 연락.
③ 조선은 청국 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으므로 청국황제의 명으로써 선교사를 조선에 받아 들이도록 할 것.
④ 청이 조선을 병합하고 그 공주를 조선(왕)이 취하여 의관을 하나로 할 것.
⑤ 서양으로부터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 대포 기타 필수 병기를 가지고 와서 조선국 왕에게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자유롭게 해줄 것 등이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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