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반 동안 씨나락 독에 숨어 살다가... 안타깝게 맞이한 비극

박만순 2026. 2. 1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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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 1945~1960 29화] 부역혐의자 학살 사건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가덕면 부역혐의자들이 구금됐던 가덕초등학교
ⓒ 박만순
"여보 얼릉 숨으세요!" 아내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김인제(1922년생) 역시 잔뜩 긴장했다. 갑자기 터진 난리에 지주와 공무원들은 사방팔방으로 피난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행정초등학교 교감인 김인제는 피난 갈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28세였던 그가 처자식만 있다면 홀가분하게 피난길에 올랐겠지만 부모와 어린 동생들, 그리고 큰집 식구들까지 18명이 이웃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열여덟 식구가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오른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인민군은 1950년 7월 13일 충북 청주에 입성했다. 청주시를 계란 흰자처럼 둘러싼 청원군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가덕면 행정리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김인제는 부모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창고 씨나락 독으로 들어갔다. 씨나락 독은 해마다 추수한 벼 중 다음 해에 종자로 쓰기 위한 볍씨를 저장하는 독을 말한다. 쌀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가에 씨나락 독이 있는데, 김인제의 형 집은 농사 규모가 커, 씨나락 독이 벼 세 가마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마침 모내기를 한 뒤라 씨나락 독은 비어 있었다.

김인제가 씨나락 독에 들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독 위에 나무판자를 올려놓고, 그곳에 농기구를 올려놓았다. 김인제만이 몸을 피한 것은 아니다. 그의 동생 김학제(당시 1935년생) 역시 인공시절 친구 집 골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인민군의 심부름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인제 어머니는 두 아들의 밥을 두 달 반 동안 매일 날라야 했다.

국군 환영대회 나갔다가...

"선생님. 반가운 소식입니다." 인공시절 김인제 교감처럼 집 안에 숨어 있던 행정초등학교 조재천 선생이었다. 김인제가 숨을 죽이고 있자 조재천은 재차 "선생님 얼릉 나오세요"라고 재촉했다. 행정초등학교 동료 교사인 조재천의 목소리를 확인한 김인제는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씨나락 독에서 나왔다.

"국군이 진주한답니다. 국군 환영대회를 열어야지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던 차에 낙동강으로 밀려갔던 국군이 수복한다니 뛸 듯이 기뻤다. 그 시간부로 김인제 교감의 두 달 반 동안의 씨나락 독 생활은 마감됐다.
김인제와 조재천은 행정초등학교 부근 마을을 각각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소집했다. 학생들을 동원해 초등학교에서 '국군 환영대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조재천이 행정리 한말(한촌) 어귀에 들어섰을 때이다.

"야 이리 와." 대뜸 반말지거리를 하는 이는 총을 든 군인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군인 양반"하는 환영 인사치레에 돌아온 군인의 대꾸는 "이 새X가!"라는 욕설과 구타였다. 조재천은 더 이상의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가덕면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다.

당시 가덕면 국전리에 살던 김인제는 국전리의 중심마을인 양지말을 다니며 학생들에게 초등학교로 모일 것을 알렸다. 하지만 그 역시 조재천처럼 잠시 후에 군인에게 붙잡혔다. "왜 이러십니까? 우리는 여러분 환영대회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라는 항변을 했지만, 군인의 총 개머리판이 김인제의 어깨를 찍어 눌렀을 뿐이다.(박만순, <박만순의 기억전쟁 4>, 2025)

군인들에 의해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된 이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공무원만이 아니었다. 똥지게를 지고 가던 젊은이도 막무가내로 연행됐다. 똥장군이 깨져 청년의 옷에 똥이 튀어 구린내가 진동을 해, 주변 사람들이 코를 감싸 쥐었다. 평범한 농사꾼에 불과하던 행정리 오영식(당시 34세)과 인차리 김준호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집과 마을에서 연행됐다.

국군은 왜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 교사와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을까? 더군다나 누가 보기에도 평범한 농사꾼에 불과한 똥지게를 진 청년까지 말이다.

인공 당시 청원군 가덕면에서 좌익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곳은 행정리였다. 그래서 이른바 행정리를 '빨갱이 동네'라 불렀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보은을 경유해 가덕면으로 오면서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의해 부역자 처형 계획을 세운 듯했다.

물론 국군 1사단이 확보한 정보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국군이 가덕면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한 후 조사를 통해 법적 처벌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을 든 군인들이 가덕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무작위적으로 잡아들인 청·장년은 가덕초등학교에 구금됐다. 심지어 남일면 문주리 사람도 연행됐다. 당시 가덕국민학교 교사였던 박희봉(1926년생)은 그의 사촌 동생이 인공시절 가덕면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된 것이다.

사실 박희봉은 특정 사상에 경도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마을인 남일면 문주리는 좌우익 갈등이 없었던 평온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단지 그의 사촌 동생이 가덕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연행됐다.

그렇다면 박희봉은 왜 남일면 소재지인 효촌리로 연행되지 않고 가덕면 소재지인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을까? 사실 문주리는 가덕면 병암리에 인접해 있는 마을로 생활권이 가덕면에 속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문주리에서는 박희봉뿐만 아니라 이장을 맡고 있던 노철우(1900년생)와 의용군에 끌려갔다 온 전흥수(1932년생)가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됐다.

가덕면 일대와 남일면 문주리에서 소위 '부역혐의'라는 혐의를 쓴 청장년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됐다. 가덕초등학교에 구금된 이들은 31개 마을 약 100명이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일대가 막 수복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인간 사냥터가 된 것은 1950년 9월 29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충북지역 군경에 의한 사건', 2010)

감투 썼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가덕초등학교에 구금됐던 이들이 학살된 터
ⓒ 박만순
"남학희 나와!" "누군데 초면에 반말이십니까?" 자식 뻘밖에 되지 않는 군인들이 다짜고짜 반말을 하자 기분이 상한 남학희는 '철없는 아이 타이르듯' 대꾸했다. 그러자 군인은 "이 노인네가 미쳤나, 어디서 말대꾸를 해"라며 수염을 잡아당겼다.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마당에서 아버지가 곤욕을 치르는 소리를 들은 남상열이 뛰어나왔다. "당신들은 댁에 아버지도 없습니까!"라며 항의했다.

"이런 빨갱이 새X가"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 장교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 감투를 썼다가 군인들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다락방에 숨어 있던 남상열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총살당한 상황이었다.

행정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남상열의 아버지 남학희는 마당에서 자식의 허망한 죽음을 고스란히 보아야만 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만큼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남학희 역시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돼 그날 밤 불귀의 객이 됐다. 마을 인민위원장이라는 것은 기껏 이장에 불과한 것이다. 누군가는 맡아야 할 감투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자식을 먼저 보내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말이다.

가덕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된 이들은 그날 저녁 초등학교 뒤편 야산과 맞은 편 야산, 두 곳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김인제가 총살당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알려 줘 동생 김학제와 가족들은 병암리 가덕초등학교 맞은편 야산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김인제가 급소에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시신 주변 땅이 맨들맨들해져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형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김학제는 반백 년 넘게 형 시신 주변의 맨들맨들해진 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좌절된 구사일생

친구 강일중의 권유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금아무개는 미원지서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필이면 바쁜 농사철에 보도연맹을 소집하지?'라고 궁시렁거리면서 말이다.

미원지서의 공기는 탁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화약고 같았다. 보도연맹원을 태운 트럭이 낭성면 머구미고개에 멈췄다. 뒷결박을 당한 이들이 구렁텅이로 발을 떼는데, 경찰이 금씨에게 도망가라는 손짓을 했다.

뒷줄에 서 있던 금씨는 같은 마을인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사람 두 명과 함께 스리슬쩍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들이 큰길에서 빠져나와 줄행랑을 칠 때, 뒤꼭지에서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머구미고개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원면 보도연맹원들이 머구미고개에서 떼죽음을 당한 날은 1950년 7월 8일이었다.

머구미고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금씨는 인공시절 부담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보도연맹원들은 나오시오!" 인민군과 금관리 지방 좌익이 금씨를 비롯해 머구미고개에서 살아나온 이들을 호출했다. 인민위원회에서 같이 일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금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금관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후퇴했던 국군이 미원면으로 오면서 인민군이 1950년 9월 25일 후퇴했다. 국군과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이 9월 27일(음력 8월 16일) 교전을 벌였다.

교전 후 국군이 금관리에 진주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몽둥이찜질을 하며 "부역한 사람이 누구냐?"라며 다그쳤다. 몰매를 이기지 못한 주민이 인민위원장 금씨 이름을 댔다. 금관초등학교로 연행돼 구금됐다. 하룻밤을 지샜는데, 금씨의 어머니가 밥을 해다 주었다. 다음날인 9월 27일 금관 숲에서 세 명이 죽임을 당했다. 좌절된 구사일생이었다.

가덕면과 미원면 금관리 사건이 국군 수복 후에 부역혐의자 학살 사건이라면 남일면 효촌리 사건은 전쟁 초기 국군에 의한 황당한 사건이었다.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김계원(1899년생)은 전쟁이 터진 후에 피난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처럼 피난 가지 않은 사람 몇몇이 가게에서 막걸리잔을 주고받을 때였다. 부상당한 국군이 가게에 들어와 김계원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물을 건네주던 김계원이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해서 무고한 사상자를 왜 많이 내느냐, 힘없이 밀릴 바에는 전쟁을 왜 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부상 군인이 '공산주의 반동분자'라고 소리를 지르며, 김계원을 인근 150m 거리에 있는 목화밭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김계원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마을주민 4명이 군인을 만류했지만 화가 난 부상 군인이 '너희들도 모두 죽고 싶어!'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더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법보다 총이 우선인 시대였다.

한국전쟁 기간에 청주·청원에서 대한민국 군경과 미군, 그리고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이는 약 2300명에 달한다.
 청주 청원 피해지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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