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체포 30년 뒤... 조정 뒤흔든 '홍길동의 그림자'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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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에 기부된 곡물을 보고 홍길동에 대한 열광을 표시하는 <은애하는 도적님아> 속의 민중들. |
| ⓒ KBS |
극중의 대중들은 홍길동이 죽었다고 알려진 뒤에도 '홍길동이 다녀갔다'며 열광한다. 지난 1월 25일의 제8회 방영분에서는 산골 빈민촌 주민들이 누군가가 자기 마을에 놓고 간 대량의 곡물을 보고 "길동님께서 우리까지 살펴주시는 건가?"라며 환호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홍길동이 다녀갔다고 판단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주민들은 홍길동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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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2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한 장면. |
| ⓒ KBS2 |
홍길동이 휩쓸고 지나간 뒤로 충청도 행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이 지역의 징세 작업이 원활치 못했다. 홍길동을 목격한 뒤로 지역 민심마저 어수선해져 더욱더 그러했다. 홍길동이 체포된 후로 10년이 넘도록 '홍길동 현상'이 이어진 것은 그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1530년에 발생한 순석(順石) 사건을 들 수 있다. 중종 25년 12월 28일자(1531.1.16.)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은 1530년 12월 20일(음 12.1) 경기도관찰사에 의해 보고된 순석 사건을 홍길동 체포 당시의 메뉴얼대로 처리했다. 순석의 활동 방식이 홍길동과 비슷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순석 사건이 홍길동 모방 사건으로 비칠 만한 이유들이 있었던 것이다.
<중종실록>은 순석을 도적(원문은 賊人)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는 일반적 의미의 강·절도가 아니었다. 반군 지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위 실록의 중종 25년 12월 1일자 기록에 따르면, 경기도 용인현 관아에 구금된 순석의 조직원은 순석을 포함해 39명이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경기도와 한성부는 물론이고 전라도와 충청도에도 암약하고 있었다. 조정은 전국에 분포된 조직원 규모를 근 100명으로 파악했다.
순석 조직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갖췄을 뿐 아니라 관료조직 비슷한 이미지도 연출했다. 위 실록의 중종 26년 1월 1일자(1531.1.16.)에 의하면, 중종은 영의정 정광필 등과의 대화에서 "이 도둑들은 옥관자를 갖추고 있다"는 말을 했다.
중종이 말한 것처럼, 순석 조직원들은 고위 관료들처럼 망건과 귀가 닿는 부분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자신들의 정치적·행정적 권위를 그런 식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 집단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었다.
왕조시대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뿐 아니라 왕실의 권력을 훔치는 사람도 도적이나 강도로 불렸다. 조선시대의 형법전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의 형률은 모반대역죄를 재물강도죄와 똑같이 도적 편에서 규정했다. 왕조시대의 법률은 왕실의 이해관계를 반영했으므로, 이 시대의 법률체계에서는 반란이나 역모가 그렇게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범을 강도로도 지칭하는 이 같은 습관은 조선왕조를 넘어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다.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신민회사건, 105인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백범 김구도 강도로 불렸다.
<백범일지>는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고 말한다. 국사범이 강도로도 불렸던 시절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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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홍길동. |
| ⓒ KBS |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1.18.) <연산군일기>는 홍길동이 옥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붉은 허리띠가 달린 관복을 입은 채로 정3품 무관인 첨지를 자칭했다고 알려준다. 이런 차림으로 홍길동은 무장 병력을 이끌고 관아를 기습했다.
홍길동은 군사적 실력뿐 아니라 정치적·행정적 권위까지 과시했다. 그 결과, 지방의회와 비슷했던 유향소의 간부들도 홍길동을 편들었다. 위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그런 지방 유지들을 적발해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라는 왕명을 내렸다.
순석 조직은 홍길동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지방과 도성에서 반체제 조직을 구성했다. 중종의 조정은 이들을 적발하자마자 홍길동 때의 매뉴얼을 적용했다. 홍길동으로 인한 충격이 그가 체포된 지 30년이 넘도록 가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익명으로 기부된 대량의 곡물을 보고 아무 근거도 없이 홍길동을 떠올리는 드라마 속의 민중들처럼, 1530년 당시의 조선 지배층도 순석 조직을 적발하자마자 홍길동부터 떠올렸다. 홍길동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얼마나 큰 공포심을 줬는지를 상상케 된다.
그런 홍길동 현상을 반영해 후대에 <홍길동전>이 출판됐고, 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홍길동을 재차 각인시켰다. <연산군일기>와 달리 소설 속의 홍길동은 혁명가나 반체제 활동가가 아니라 의적이었다. 그래서 소설 속의 홍길동은 조선왕조 체제 내에서 좀더 안정적인 방법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홍길동전>이 생명력을 발휘한 것은 홍길동의 활약을 목격한 최초의 세대가 그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후대에 생생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고위 관원을 자칭하며 군대를 이끌고 봉건왕조에 도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충청도의 행정체계와 민심은 10년 넘게 수습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그는 민중과 지배층 양쪽에서 두고두고 기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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