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도 정치적 메시지일까... 끝내 올림픽 실격당한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선수

이준목 2026. 2. 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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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망한 스포츠 선수 24명 모습 담긴 헬멧 착용... IOC "규정 위반, 실격"

[이준목 기자]

 우크라이나의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2026년 2월 10일, 이탈리아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열린 2026년 동계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훈련 세션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며 도착하고 있다.
ⓒ 연합뉴스 = AP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헬멧' 착용을 강행했던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선수가 실격 처분을 받으며 동계올림픽 출전이 결국 무산되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12일(한국시각)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스켈레톤 종목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대표팀 선수인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에게 실격 처분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헤라스케비치는 남자 스켈레톤 예선을 앞두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우크라이나 스포츠 선수 24명의 이미지가 새겨진 추모 헬멧을 착용하고 연습주행을 하는 모습이 공개되어 주목받았다. 이 헬멧에는 역도 선수 알리나 페레구도바, 복서 파블로 이셴코, 아이스하키 선수 올렉시 로그이노우 등의 초상이 담겨있다.

하지만 IOC는 헤라스케비치의 헬멧이 <올림픽 헌장 제50조 2항> '어떠한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전도 올림픽 경기장, 시설 또는 기타 지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위반한다고 판단해 '사용 불가'를 통보했다. 대신 IOC 측은 "숨진 동료들을 추모하려는 선수의 마음은 이해한다. 추모 헬멧은 IOC 규정에 위배되지만 '검은 완장'을 착용하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헤라스케비치는 타협안을 거부하며 헬멧을 착용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헤라스케비치는 자신의 SNS를 통하여 "나의 헬멧은 추모의 의미이지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함께 올림픽에 출전한 우크라이나와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 관계자들도 연이어 "추모는 규정 위반이 아니다"(Remembrance is not a Violation)라는 메시지를 공유하며 지지의사에 동참했다.

헤라스케비치가 올림픽에서 전쟁과 관련된 메시지를 낸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022년 베이징 대회 기간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No war in Ukraine)라는 표지를 든 바 있다, 당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당시의 IOC는 '평화를 촉구한 메시지'라며 올림픽 헌장 위반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헤라스케비치는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4년만에 밀라노 대회에서의 추모 헬멧은 전혀 다른 해석이 나왔다.

IOC가 올림픽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선수를 제재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1968년 멕시코 하계 올림픽 육상 200m 우승자인 미국의 톰 스미스와 3위 존 카를로스는 시상대에서 '흑백 차별'에 항의하기 위하여 국기를 쳐다보지 않고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함께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펼쳤다가 선수촌에서 퇴출당한 ''검은 장갑 사건'(Black Power Salute)' 사건이 유명하다.

당시 이들은 선수촌에서 즉각 퇴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올림픽 정신을 왜곡했다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낸 용기 있는 선구자들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IOC "메시지의 문제는 아니지만..."
젤렌스키 "메달보다 값진 행동"
 우크라이나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 선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으로 사망한 선수들을 추모하는 헬멧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밀라노 코르티나 2026 동계올림픽에서 실격 처리됐다. 그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 로이터
'AFP 통신' 'BBC'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마크 아담스 IOC 대변인은 13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올림픽 메인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관련 언론 브리핑에서 "전 세계에는 수많은 분쟁 지역이 있다. 올림픽 경기 도중에 모두 분쟁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이라면서 "헤라스케비치가 어떤 메시지를 말하려 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올림픽 경기 중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게 문제"라며 추모 헬멧 사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커스티 코번트리 IOC 위원장은 헤라스케비치를 설득하기 위하여 대화를 나누다가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짐바브웨의 수영 선수 출신인 코번트리 위원장은, IOC의 공식 입장이나 원칙과는 별개로 4년간 기다려온 올림픽 출전이 불발될 수 밖에 없었던 헤라스케비치의 사정에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IOC의 출전 금지 조처가 발표되자 헤라스케비치는 다시 자신의 SNS 계정에 글을 올리며 "나는 올림픽에 나갈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내 동료들의 희생 덕분에 이번 올림픽이 열릴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서 "IOC가 사망한 선수들을 배신한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존엄성의 문제"라고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헤라스케비치는 IOC의 결정에 대하여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이의를 제기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또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헤라스케비치에게 "우크라이나 국민을 향한 이타적인 봉사와 시민적 용기, 자유와 민주적 가치를 지키려는 애국심을 기려 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SNS를 통하여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운동선수와 코치 660명이 사망했다. 올림픽은 침략자가 아니라 전쟁을 멈추는 것을 도와야 한다. IOC의 출전 금지 결정은 그렇지 못했다. 공정과 평화를 지지하는 올림픽 정신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는 헤라스케비치 선수가 한 일이 자랑스럽다. 용기를 갖는 것은 어떤 메달보다 값지다"고 덧붙이며 지지의사를 나타냈다.

IOC의 실격 결정에 대한 전 세계 누리꾼들의 반응도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헤라스케비치의 추모 헬멧을 둘러싼 논란은 '정치적 메시지 금지'라는 순수한 올림픽 정신과, 정당한 '표현의 자유' 사이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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