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 군주와 글쟁이 신하들

김삼웅 2026. 2. 1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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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향연 85] 정조 주변의 대표적인 호학(好學) 지기들을 살펴보자

[김삼웅 기자]

 화령전에 걸린 정조 어진
ⓒ 위키미디어 공용
대저 사가의 대법(大法)은 계통을 밝히고 찬역을 엄하게 하여 시비를 바르게 하고 충절을 포양하며 전장을 자세히 하는 것이다.(안정복, <동사강목>)

춘추는 현실적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도 글로 대신 주벌하는 책으로 글자 하나 거취에 따라 나타나는 의리가 자별하다. 필부나 암군, 난신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칼보다 날카로운 필부의 붓 때문이다. 춘추의 필법을 통해 선악이 드러나고 존비가 구분되고 정사正邪가 가려진다.(이익, <필법론>)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르몽드>지 창간한 뵈브메디)

역사는 전설로 퇴색한다. 사실은 의심과 이론(異論)으로 구름이 낀다. 비석의 비문은 삭아가고, 조상彫像은 대좌에서 굴러 떨어진다. 대원주(大圓柱)이건, 아치이건, 피라미드이건 모래를 쌓아올린 것 밖에 더 되느냐. 거기에 새겨진 묘비명도 결국은 먼지 위에 쓰여진 글에 지나지 않는다.(W. 어빙, <웨스트민스터사원>)

공자가 노나라 역사로 인하여 춘추를 지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한 후로 천하에 난신과 적자가 두려움을 가졌다. 그런데 공자가 춘추를 기술할 적에 더 써야할 것은 더 쓰고 삭 해야 할 것은 삭했다. 이것을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문장이 좋은 자유(子遊), 자하(子夏)도 한 구절을 보태지 못했다. 제자들은 그 춘추를 읽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자도 춘추뿐이고 또한 나를 죄줄 자도 춘추뿐이다."(<세가(世家)>)

정조는 천성적으로 학자의 기질을 지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열심히 읽었다. 한 책을 끝낸 후에는 계속 다른 책을 읽었고, 이미 읽은 서적은 차례로 번호를 매겨 정식(程式)으로 만들었다. 읽는 과정을 세울 때는 어느 책 어느 편 몇 행을 읽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정해 읽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먼저 대본(大本)을 세우고 다음에 조목(條目)을 정하여 실행하는 조직적이고 치밀한 습성을 드러냈다. 정사를 보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힘써 공부해야 마음이 편했고, 책 속에서 피로를 푸는 경지에까지 이르며 살았다. 병이 날 때가 아니면 독서를 그치지 않았고 삼복의 불꽃같은 더위나 여가에도 계속할 정도였다.

신양선(辛良善)씨가 <조선후기 정조연구>라는 논문에서 <정조실록>, <홍제전서>, <일득록>, <일성록> 등에 나타난 정조의 '책읽기'에 대해 쓴 내용의 일부이다. 이와 같은 호학하는 군주이다보니 그의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선비들이 몰려들었다. '몰려들었다'기 보다 '끌어들였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정조 주변의 대표적인 호학(好學) 지기들을 살펴보자.

채제공(1720~1799)은 정조가 10년 동안 재상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던 신하다. 그는 열린 시대정신으로 천주교를 인식하였고 실록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박람강기하여 각종 서책을 편찬할 때면 정조가 취사선택에 대해 일일이 물었다. 정약용 등 천주교를 믿는 서학교도들을 포용하였지만 정조가 죽으면서 신유박해 때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가환(1742~1801)은 정조가 '진학사(眞學士)'라고 부를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며 보지 않은 책이 없고 기억력이 귀신같았다."(황사영, <백서>)고 할 정도의 대학자였다. <국조보감>과 같은 서책은 그가 아니면 편찬이 쉽지 않았을 업적이다. 승지·대사성·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는 동안 반대편의 음해로 여러 차례 유배를 겪었다. 그때 마다 정조의 아낌을 받아서 조정의 큰 일을 맡았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때 서학교도로 몰려 순교했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문원(文苑)은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책을 읽고 감화를 받아서 교리를 맨 처음 한글로 번역할 만큼 신심이 두터웠다.

"신은 본래 초야에 묻힌 한미한 사람으로 부형의 음덕이나 사우(師友)의 힘도 없었는데, 오직 전하께서 이룩하고 길러주신 공에 힘입어 어린 몸이 장성하게 되고, 천한 신분에서 귀하게 되었다. 대체로 지식이 조금씩 진전되고 작록이 올라간 것이 어느 것 하나 전하의 지극한 가르치심과 정성에 의해 훈도되고 길러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정다산전서> 집1 권9)고 토로할만큼 정약용은 초야에서 '그릇'을 알아 본 정조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도 정조 사후 서학교도로 몰려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박제가(1750~1815)는 정조가 그의 학식이 상대를 찾기 어려운 인재라 하여 '무쌍사(無雙士)'라 불렀지만 서얼 출신으로 벼슬이 검서관의 낮은 직위였다. 그러나 군주의 총애 속에서 규장각 도서 편찬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정조가 친히 불러 귀한 서적을 주고 특별 휴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규장각 검서관 시절 이덕무·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이른바 '4검수'로 이름을 떨쳤다. 사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북학의>는 병기의 개선·영농법의 개량·선진기술의 도입 등을 담았으며 종두법의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크게 발달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학파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박제가는 "선비가 입언(立言)할 때는 시대를 아는 것이 귀한 것이다."고 하여 현실인식과 시대정신을 중요시했다.

이덕무(1741~1793)는 박제가가 그를 일컬어 "그의 품식(品識)이 제1이고, 독행(篤行)은 제2이고, 박람강기는 제3이고, 문장은 제4에 속한다"고 평가할 정도로 인품·품행·학식·문장이 출중한 학자였다. 이덕무 역시 서얼 출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지만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검서가 되고 <도서집성>, <대전회통>, <국조보감> 등을 편찬하였다. 정조는 이덕무의 글에 '산림기(山林氣)'가 있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가인家人 같이, 군신 관계가 아닌 지기 로 여겼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후기 4대 시인의 한 명으로 꼽힐 만큼 고증학·문자학·전고(典故)·글씨 등에 조예가 깊었다. 형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내고 실학파들과 사귀면서 편서작업에 참여하여 정조의 지우를 얻었다. 좋은 글을 많이 남겼다.

이들 외에도 홍양호·위백규·강응환 등 정조의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문인·학자들이 호학의 군주와 함께 찬란한 문예의 화원을 일구었다. 정조에게 이들 신하의 존재란 "정조는 붕우(朋友)란 오륜 중 말末에 있으나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자익(資益)이 되는 까닭에 오히려 사륜지도(四輪之道)가 된다고 하면서 군(君)은 우신(友臣)이 있으므로 군신 또한 우(友)라고 하였다."(신양선, 앞의 글) 고 할 만큼 믿음직한 호학의 벗이었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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