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미술관 무균 전시장에 유기물 흙이 들어왔다
현대미술관 서울관 ‘소멸의 시학’전
대규모 흙, 식물·바람·곰팡이 소재
관람객들의 촉각·청각·후각 자극
인간 중심주의 반성 의지 담은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 흙이 들어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이 새해 첫 전시로 선보인 국제 기획전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에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술계에 부상한 ‘포스트 휴머니즘’, 즉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을 전시로 풀어냈다는 의미가 있다. 비슷한 주제가 지금까지 없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는 전시장 한가운데로 유기물인 흙이 대규모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모험이고 상징적이며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 고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소장하기에 항온·항습·항균을 내세우는 ‘무균의 미술관’에서 유기물은 금기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흙이 들어온 건 국내 처음은 아니다. 사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에서 2024년 브라질 작가 댄 리 개인전을 하며 흙, 꽃, 버섯, 곰팡이 같은 유기물 요소를 전시장에 끌어들이며 ‘화이트 큐브’ 전시 문법을 가장 먼저 깬 바 있다. 그때는 로비까지였다. 로비를 넘어 전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치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흙이 전시장 내부로 성큼 들어왔다. 그것도 유일한 국립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도됐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계에 미칠 파급력의 수준이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8일 서울관 지하 6전시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싸한 흙냄새가 코끝으로 훅 끼쳐 왔다. 평소라면 조각이든 회화든 걸렸을 192㎡(60평) 전시장 바닥에 밭처럼 흙이 깔려 있었다. ‘경작자’를 자처한 관람객이 밭 갈듯 흙을 고르고 있었다. 일부는 흙을 주머니에 주워 담았다. 미국 작가 아사드 라자의 설치 작품 ‘흡수’인데 커피 찌꺼기, 택배 상자, 솔잎, 닭뼈 등 서울에서 나온 폐기물을 분해해 만든 흙으로 제작했다. 관람객 박소진씨는 “지금까지 전시는 보는 경험만 제공했는데, 이건 흙을 만지고 냄새 맡는 등 다양하게 감각하는 것이라 특이하고 신선했다”고 말했다.

또 일본 작가 유코 모리는 과일에 전극을 꽃아 썩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분 변화로 전등을 밝히고 음악 소리가 나오는 설치 작품 ‘분해’를 내놨다. 여다함의 ‘향연’은 뜨개질로 향로를 만들고, 향을 피워 연기를 일으키며 그 움직임을 관람객이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7전시실에서도 유기물이 대거 전시 요소로 등장했다. 6전시실이 ‘삭는 것(소멸)’이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됨을 이야기한다면 이곳은 식물, 바람, 곰팡이, 곤충 등 비인간 주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을 다룬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한 댄 리도 이 섹션에 초대됐다. 그는 강황으로 염색한 직물, 시든 꽃, 항아리, 마 끈 등을 늘어뜨리거나 볏짚 위에 얼음을 설치해 애도의 풍경을 만들었다.

마야의 후손인 과테말라 출신 에드가 칼렐의 작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는 30개가량의 돌을 제단 삼아 각종 과일과 야채를 올려둔 설치 작품이다. 조상들에게 제의를 지내는 켈치족 전통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한국 작가 고사리의 ‘초사람’은 풀의 한자 ‘초(草)’에서 온 것으로, 제초된 풀과 흙을 이겨 눈사람 모양을 만든 것이다. 중정과 야외 정원 곳곳에 놓인 풀 사람은 바람에 사라지는 운명이 되며 그것이 작품의 개념이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손혜민·신현진)은 우뭇가사리로 만든 바이오 플라스틱을 국수 다발 늘어뜨리듯 전시장에 걸어두고 관객들이 그 안을 걷고 만지며 감각할 수 있게 했다. 한국의 여성예술인 모임 ‘그린레시피랩’은 지속 가능한 내일을 위해 분해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양파·억새·홍차버섯·쪽·나뭇잎·밀랍·구운 모래·택배 상자 등 16종의 미래 재료를 제안했다.
기획전 ‘소멸의 시학’은 이처럼 국내외 작가 15인(팀)의 작품 50여점을 통해 유일무이한 창작의 주체로서 인간이 물러선 자리에 흙, 풀, 바람, 곰팡이 등 비인간 존재가 들어서 함께 만든 순환하는 작품들의 이야기라고 이주연 학예사가 밝혔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제보다 더 주목을 끄는 것은 무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국립미술관에 박테리아를 품은 작품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이미 1970년대 대지 미술, 생태 미술이 등장하며 유기물이 작품의 매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는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쿤스트할레(소장품 없이 작가가 중심이 돼 전시만 하는 공간) 등에서 유기물 작품을 자주 선보였다. 특히 한국 여성 작가 이불이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 썩어가는 생선을 전시했다가 철거당하자 모마를 상대로 강력하게 문제 제기한 사건은 유기물 금기 정책의 타당성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인류세, 포스트 휴머니즘이 예술계 전반의 중요한 담론으로 대두되면서 비인간 주체 중 하나인 유기물이 작품의 재료로 등장하는 일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국제적 흐름 속에서 마침내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이 ‘무균 미술관’ 기조를 폐기하고 살균처리 흙이 아닌 박테리아를 품은 흙을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것이 소장품 정책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여부다. 2017년 연기백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기획전에 서울 가리봉동 낡은 주택에서 떼 낸 벽지를 해체해 커튼처럼 거는 설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작품은 소장 논의가 있었으나 다른 소장품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최종 소장이 거부됐다.
아트선재센터 관장을 지낸 김장언 미술기획자는 “구미에선 유기물을 품은 작품을 전시한 뒤에는 이를 소장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도록 1년 전부터 연구를 하며 노하우를 비축한다”면서 “국립현대미술관도 무조건 거부가 아니라 흐름을 반영해 소장품 연구 및 보존 정책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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