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숭배 수준의 홍보영상인가, 진솔함 담은 다큐인가 [이게 이슈]

이영훈 2026. 2. 9. 12: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슈] 7500만 달러 쏟아부었으나 극단적 격차 보이는 <멜라니아>의 명암

[이영훈 기자]

 1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케네디 센터에서 열린 아마존 MGM 스튜디오의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 월드 프리미어 행사에서 미국 영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연설을 위해 연단으로 향하고 있다.
ⓒ AFP 연합뉴스
영화 <기생충> 제작비의 7배에 달하는 7500만 달러(1097억 원)를 쏟아부었지만, 미국의 영화 리뷰 사이트 '로튼 토마토'가 주는 비평가 점수(Tomatometer)는 <기생충>의 1/10을 밑도는 영화가 지난 1월 30일 미국에서 논란 속에 개봉되었다. 지난해 1월에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을 앞두고 영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의 20일간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다.

이 영화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태생적으로 지울 수 없는 정치색에 있다. "영부인 숭배 수준의 홍보영상에 불과하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에 "영부인의 우아함과 진솔함을 보게 되었다"는 지지자들의 반응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겉으로는 미국 영부인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지만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호불호가 심한 남편 트럼프를 온전히 덜어내진 못한 모양새다.

이 같은 정치색 논란은 '로튼 토마토'의 평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평가 점수는 8%로 처참한 수준이지만 관객 점수(Popcornmeter)로는 영화 <대부>를 뛰어넘어 무려 99%에 달한다. 미국대중문화지 <롤링스톤>은 이 수치를 '로튼 토마토' 역사상 가장 큰 평론가와 관객의 평점 격차라고 보도했다.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자 일각에서는 친트럼프 성향의 사람들이 봇을 동원해 평점을 끌어올린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로튼 토마토'의 모회사 '버선트'는 지난 주말, 관객 점수가 실제 티켓을 구매한 관객의 평점을 담은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의 영화 리뷰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멜라니아>의 비평가 점수(Tomatometer)는 8%이지만 관객 점수(Popcornmeter)는 99%에 달한다.
ⓒ 로튼 토마토
뜨거운 논란에도 불구하고 <멜라니아> 개봉 첫 주 성적이 나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영화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개봉 첫 주말을 기준으로 약 800만 달러(117억 원)를 벌어들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개봉 첫날에만 트럼프 여사의 팬들이 몰려 700만 달러(102억 원)를 기록했으며 2012년 영화 <침팬지>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가장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 다큐멘터리와 다르게 주목할 만한 점은 관객 편향성이다. 미국 시골 지역에서 46%, 플로리다와 텍사스, 애리조나주를 포함한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판매 수익의 53%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심지어 클리블랜드의 한 극장의 경우 인근 노인복지센터에서 동원된 버스 두 대 분량의 노인들로 관람석을 채웠다는 사실도 꼬집었다.

공화당 우세 지역, 특히 고령의 백인 여성들이 이 영화 흥행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텍사스의 뉴스매체인 <크론>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은 백인(75%), 여성(70%) 그리고 55세 이상의 고령이며, 고령의 백인 여성들이 구매한 영화표가 판매된 60만 장 가운데 70%를 차지했다고 지적했다.

<크론>은 달라스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로버트 제프리스의 사례를 들며 보수성향 교회와 같은 친트럼프 기관들이 단체로 영화를 관람했을 가능성도 내비쳤다. 실제로 제프리스 목사는 영화 개봉 전후 자신의 설교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미국 역사상 가장 품격 있고 신앙심 깊은 영부인 중 하나"라며 멜라니아를 추켜세웠다.

멜라니아의 하이힐은 높았다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루이스빌에 있는 <멜라니아> 상영관에서는 <멜라니아> 영화 포스터도 걸려있지 않았다.
ⓒ 이영훈
주말이었던 지난 7일(현지시간) 오후 텍사스주 루이스빌에 있는 <멜라니아> 상영관을 직접 찾아가 봤다. 루이스빌시는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공화당 브랜든 길 의원의 지역구로, 2024년 선거에서 약 62%의 득표율로 당선된 공화당 우세 지역이자 이른바 기독교 복음주의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이날 기자가 주목한 영화 외 관전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공화당 텃밭으로 꼽히는 텍사스에서 여전히 개봉 초반의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지, 아울러 실제로 고령의 단체관람객들이 찾아오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싱거웠다. 미리 예매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관은 텅 비어 있었고 영화가 시작될 무렵 입장한 백인 노부부 4쌍과 중년의 백인 가족 4명이 전부였다. 정치적 구호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 없이 조용히 관람하는 분위기였다. 극장 안팎으로 <멜라니아> 영화 포스터도 걸려있지 않아 여기가 텍사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라운지 의자 덕분에 편하지만 지루한 2시간이 흘러갔다.

영화 <멜라니아>에서 멜라니아 트럼프의 하이힐은 높았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열정적이었지만 아직 모델의 모습을 벗지는 못했다. 멋진 모자를 쓰고 디자이너들의 도움으로 화려한 의상을 제작해 가며 바꿔 입었다.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 팔짱을 끼는, 늘 보던 세련된 미국 영부인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으나 대통령 자리에 오른 남편 때문에 강제로 영부인이 된 인터넷상의 밈처럼 불행한 영부인 모습을 담았으면 차라리 나았으려나? 영화 전체에 끊임없이 깔리는 배경음악으로 감동을 강요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할리우드에서 퇴출당했던 브렛 래트너 감독의 야심 찬 복귀작에서는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도, 대통령의 취임식도 모두 영부인을 위한 무대가 되어 버렸다.
 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버스 정류장에 다큐멘터리 영화 <멜라니아>의 포스터가 훼손된 채 붙어 있다.
ⓒ AFP 연합뉴스
정치적 선전이라는 비판 속에 개봉한 이 영화는 악재도 겹쳤다. 개봉 무렵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미국 시민권자인 르네 니콜 굿과 알렉스 프레티가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에 대한 항의로 일부 시민들이 <멜라니아>의 영화 포스터에 히틀러의 수염이나 악마의 뿔을 그려 넣는가 하면,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 있다는 낙서를 하는 등 여러 차례 포스터 훼손 사건도 있었다.

자신의 영화 개봉을 앞둔 지난 1월 29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멜라니아 트럼프는 희생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염두에 둔 듯 '비폭력,' '통합,' '국경을 넘어온 범죄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등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화 말미에서 멜라니아 트럼프는 "어디서 왔든 모든 이는 똑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이 말이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있는 미국에서 얼마나 진심 있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전 미국으로 건너온 슬로베니아 출신 이민자의 억양을 트럼프 지지자들이 참아내는 것을 보면 멜라니아가 "트럼프가 좋아하는 유일한 이민자"라는 <뉴욕타임스> 설명이 잘 맞아떨어져 보였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