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에 묻고 쇠망치로... 인민군 후퇴기, 청주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참상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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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탄 청주형무소 후퇴하는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불타 버린 청주형무소 |
| ⓒ 진실화해위원회 |
문철근(1928년생)은 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청주형무소에 불을 지르는 순간 지옥의 구렁텅이에 있었을까? 해방 후 청주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문철근은 어느 날 박기운으로부터 치안대 활동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박기운의 제안에 문철근은 흔쾌히 동의했다. 박기운은 청주에서 초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청주경찰서에서 99식, 38식 총을 나눠 받은 치안대원들은 박기운으로부터 사격법을 배우고 치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치안대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이 후일 반동으로 몰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6.25 직후 문철근은 미원을 경유해 보은 방향으로 피난을 갔다. 미원에서 하룻밤을 잔 그는 지게에 밥을 싣고 피난길에 나섰다. 길을 가로막은 인민군의 "동무는 뭐 하는 사람이오?" 물음에, 상과대(현재의 청주대학교) 학생증을 내밀었다. "동무! 해방이 됐으니 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말을 듣고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에 오자마자 거리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인민군 정치보위부가 있던 민주식 별장 지하실로 끌려갔다. 4~5일 구금되어 있는 동안 구경한 것이라곤 소금 덩어리와 주먹밥이었다. 또 하나는 자술서. 자술서에 쓴 치안대 활동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빌미가 되었다.
정치보위부에서 기초조사를 받은 그는 탑동에 있던 청주형무소에 끌려가 감금되었다. 1사 23 감방이 그가 갇힌 곳이었다. 한 감방에 18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우익단체 활동을 한 사람들이다.(박만순, <기억전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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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봉 당산에서 학살된 김기봉 |
| ⓒ 박만순 |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출신 신교식(1922년생)은 청주공업학교 재학 당시에 전국학생총연맹(학연)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인공시절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청원군 현도면 시동리 출신 김기봉(1911년생)은 시동리 구장으로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 그는 현도면의 유력인사로 시동교회 설립 당시 땅을 희사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선거관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피난 갔다가 돌아오던 중인 1950년 8월 청원군 문의면에서 고재성이라는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현도분주소(현도지서)를 거쳐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당시 청주형무소 내에는 여자수용소 1개 동과 남자수용소 3개 동이 있었다. 여자수용소에는 6개의 감방이 있었고 남자수용소 3개 동은 각각 독방과 18명씩 수용하는 일반감방이 30개가 있었다. 남자수용소 중 1사는 미결수를 2, 3사는 기결수를 수용했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 청주형무소에는 우익인사 약 700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청주시 용정동 구장(이장)이었던 김용희(1914년생)는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청주내무서(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청원군 오창면 괴정리 출신 김종열(1923년생)은 6.25 당시 예산경찰서에 근무했다. 그는 경찰의 남하 명령이 내려진 후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고향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청주시 봉명동 남대희(1897년생)는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 간부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김종열과 남대희 역시 김용희처럼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당시 청주경찰서는 연와조 2층 건물이었으며, 1층에 수사계, 보안계, 직할파출소 등이 있었고, 유치장은 경찰서 동쪽 편 반지하에 있었다. 유치장은 여자유치장 1개 방과 남자유치장 7개 방 등 모두 8개 방이 있었다. 유치장의 크기는 약 2.5평으로 1개의 방에 많게는 20~30명씩 수감되기도 하였다. 당시 청주경찰서 유치장에는 우익인사 150명 이상이 감금되어 있었다.
현재 명장사가 위치한 곳이 한국전쟁 당시에는 정치보위부 건물이었다. 정치보위부 건물에는 대부분 청주 외곽에서 이송되어온 사람과 청주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직접 체포된 사람들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보통 2~3일간의 조사를 받은 후 청주내무서 또는 청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사건 당시 정치보위부 건물에 감금되어 있던 이들은 뒤늦게 체포되어 사상 및 활동 심사를 받고 있던 이들로 100여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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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산 학살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우익인사들의 학살된 모습. (모자이크는 편집 과정에서 추가) |
| ⓒ 진실화해위원회 |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라 달은 휘영청 떠올랐다. 달이 밝아 앞뒤가 구분되었으나 걷는 이들의 발걸음은 모두 만취한 이들 같았다. 청주 동공원이라고도 불린 당산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하지만 초입은 급경사이다. 뒷결박 당한 상태라 죽음의 대열이 당산에 오르기까지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자신들이 죽을 것을 뻔히 예감했지만 막상 당산 정상에 오른 이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곳이 내 무덤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잠시였다. "앞줄. 구덩이로 들어갓!" 혼이 나간 이들은 몽유병자처럼 구덩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구덩이에 흙을 채웠다. 흙 위에는 목만 남아 있게 되었다.
뒷줄에 서있던 이들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뒷줄에 서 있던 이들은 '쾅쾅'하는 소리에 오줌을 지렸다. 총을 쏴 마지막 순간이나마 고통 없이 저세상으로 갈 것을 기대했던 그들의 작은 소망(?)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인민군은 총알이 아까웠던지 쇠망치로 머리를 가격했다. 비명과 함께 눈, 코, 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10명이 저세상으로 갔다.
다음 줄과 다다음 줄... 20여 줄이 생과 사를 달리했다. 죽음의 땅인 당산에서 청주형무소까지는 불과 직선거리 220m에 불과했기에 감방 안에 있던 문철근의 가슴은 콩당콩당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렸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됐을까?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휘발유 냄새가 났다. 아직 죽음의 땅으로 끌려나가지 않은 이들을 태워 죽일 작정인지 휘발유를 뿌린 것이다. 사실 그 순간 인민군들은 국군이 보은까지 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당산에서의 광란을 멈추고 청주형무소를 불질러 남아 있는 이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기로 작정한 터였다.
문철근은 동료들과 함께 죽기 살기로 감방문을 밀쳤다. '쿵'하며 감방문이 열렸다. 몇 개의 출입구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뛰쳐나온 이들은 형무소 뒷문으로 갔다. 거기에는 축구 국가대표 선수인 김진우 형 김흥권도 있었다. 형무소 뒷문에 있던 사람들이 전봇대 지선을 타고 탈출했는데, 이때 살아난 이가 약 200명이었다.
이때 탈출하지 못하고 당산에서 생매장 후 죽임을 당한 이들은 220명, 형무소 안에서 불타 죽은 이들은 14명이었다. 14명 중 미군이 13명이었고, 1명은 민간인이었다. 1950년 9월 24일 밤과 25일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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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형무소 인근 지형도 청주형무소 인근 지형도 |
| ⓒ 진실화해위원회 |
신속하게 옷을 벗은 남대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뒷결박을 당했다. 남대희와 동료들은 청주경찰서에서 약 300m 거리에 있는 서문다리로 이송되었다. 서문다리 아래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몇 개 있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인 웅덩이였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벗겨진 이들을 웅덩이에 들어가게 한 후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뒷결박을 당한 이들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설령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홀딱 벗겨졌기 때문에 식별이 쉽게 되었다. 그때서야 죽음을 앞둔 이들은 저승사자들이 자신들을 청주경찰서에서 옷을 벗긴 이유를 알았다.
추석을 이틀 앞둔 1950년 9월 24일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에서 120명의 떼죽음이 있었다. 예산경찰서 경찰 김종열도, 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남대희도,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용정동 이장 김용희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비슷한 시각 당산 토성(토굴)에서 또 하나의 '죽음의 굿판'이 벌어졌다. 정치보위부 건물로 사용된 민주식 별장 지하실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 95명이다.
전쟁 초기 후퇴했다가 수복 시기에 돌아온 청주경찰서 사찰과 모형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있던 우익인사 수십 명이 민영은 묘 아래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납치) 사건', 2008)
민영은 묘 아래인 당산토굴은 현재 체육공원이 형성되어 있다. 9월 24일과 25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인민군 후퇴기인 1950년 9월 24일과 25일 사이에 청주·충북지역 우익인사는 몇 명이 학살되었을까?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청주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미군 자료에 의하면 최소 449명이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최대 700여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우익인사들을 집단 학살했을까?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은 사면초가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UN군 진주 후 적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활동할 자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1', 1975)
이에 따라 청주지역에서도 1950년 9월 24일~25일 청주형무소와 청주내무서, 청주시정치보위부 등에 잡혀 있던 사람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은 국군 수복 후 부역자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고, 감금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불운한 역사의 반복이었다.
역사에서 마땅히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념과 사상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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