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어른 행세] 손잡이 떨어진 냄비, 버리려다 다시 넣어둔 이유
서울, 부산, 경기도 가평, 제주, 미국에 흩어져 사는 6인이 쩨쩨하지만 울고 웃고 버티며, 오늘도 그럭저럭 어른 행세하며 살아가는 삶을 글로 담습니다. <편집자말>
[김보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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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잡이 없는 냄비를 꺼내 쓸 때마다, 이 녀석의 쓰임이 언제 다할지 궁금해진다. |
| ⓒ 김보민 |
사실 나는 지난해부터 부엌살림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혼수로 장만한 그릇과 컵, 각종 도구는 너무 오래 써서 지겨워졌고, 이곳저곳에서 물려받은 그릇들은 조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중구난방이었다. 벼룩시장에서 데려온 그릇 중 일부는 집에 와서 다시 보니 그날의 설렘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온라인으로 그릇과 냄비 세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련된 디자인, 한식과 양식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구성,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안전한 재질로 만들어진 제품들. 어느 것 하나 눈길이 가지 않는 게 없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더 나은 제품을 발견하면 이전에 담아 둔 물건을 슬며시 삭제하며 머릿속으로 나만의 부엌을 꾸미고 있었다.
새로운 살림을 들이려면, 부엌 찬장과 서랍을 가득 채운 예전 살림들을 먼저 비워야 했다. 내 손으로 버리자니 아까워서, 스스로 깨지고 고장 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스테인리스 냄비의 손잡이가 떨어졌다. 옳다구나 싶어 내다 버리려던 참에, 나는 냄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우리 가족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살림들
한쪽 손잡이를 잃은 이 냄비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이 회사 추석 선물로 받아온 스테인리스 냄비 세트 중 하나다. 혼수로 장만한 냄비가 너무 무거워 애를 먹고 있던 차에 만난 터라 더욱 반가웠던 살림 도구였다. 이 냄비가 우리 집에 온 지도 어느덧 햇수로 열두 해가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나의 부엌 파트너로 함께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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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많은 그릇을 언제 이렇게 모았을까. 살림살이가 느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찬장을 열 때마다 괜히 겁이 난다. |
| ⓒ 김보민 |
이야기는 부엌에만 쌓여 있을까. 거실을 둘러봐도 온갖 이야기가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한국에서 배에 실어 싱가포르로 보냈던 소파와 식탁, 책상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보스턴까지 왔다. 미국으로 이사 오던 시기가 코로나 직후라 물류비는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서 새 가구를 사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손때 묻은 가구를 선뜻 버릴 수가 없었다.
나와 남편 둘만 앉아 밥을 먹던 식탁에는 이제 네 식구가 둘러앉는다. 아이들이 이유식을 먹으며 포크로 긁어 생긴 흠집들은 지저분하기보다 정겹다. 책 보고 글 쓰는 시간을 가지라며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네준 책상에서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도 한다. 소파를 트램펄린 삼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조금 자라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인형집을 꾸민다.
살림에는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의 이야기가 먼저 쌓였다. 이것들을 내다 버리는 일은, 추억까지 함께 내동댕이치는 일처럼 느껴져 마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수십 년 된 잡동사니를 껴안고 사셨다.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반짇고리통,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TV장, 늘 쓰시던 냄비와 그릇들까지. 할머니 집은 그 자체로 할머니였다.
부엌과 거실을 천천히 살피다 보니, 내 집이 조금씩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쪽 손잡이를 잃은 스테인리스 냄비는 언제까지 우리 집에 머물게 될까. 남은 손잡이마저 떨어져야 냄비의 역할을 마치고 떠나게 될까. 아니면 다른 쓰임을 찾아, 조금 다른 모습으로 계속 우리 집에 남게 될까.
손잡이 하나를 잃은 냄비로 달걀을 삶을 때마다, 나와 함께 살아온 살림살이들 속에 숨어 있는 나와 가족의 지난 이야기가 조용히 들려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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