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전력, 동해안에 묶인 화력발전소

진재중 2026. 2. 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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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은 생산되는데 송전망이 없다

[진재중 기자]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달리다 보면 삼척과 동해, 강릉에 이르기까지 해안가에는 대형 화력발전소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설비와 높은 굴뚝은 이미 완공을 마친 상태다. 수십조 원이 투입된 시설들이다. 그러나 발전소 앞은 조용하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고, 설비는 멈춰 서 있다. 언제든 전기를 만들 수 있지만 실제 가동률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력을 생산할 능력은 충분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만들어진 전력이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송전망이 부족한 탓이다. 현장에서 만난 발전소들은 하나같이 같은 상태다. 전기는 준비돼 있지만, 흐르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 발전소들은 지금, 갈 길이 없어 멈춰선 상태다.

부족한 것은 전기가 아니라 길이다
 강원 삼척 맹방해변 앞에 들어선 삼척화력발전소 해상공사장. 전력은 생산할 수 있지만, 수도권으로 보낼 길이 막혀 발전소는 충분히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 진재중
정부는 AI·반도체·데이터센터를 미래 핵심 산업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 산업들이 요구하는 것은 구호나 선언이 아니다. 단 한 순간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이다. 고성능 반도체 공정과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미세한 전압 변동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면 설비는 멈추고, 산업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미래 산업의 경쟁력은 기술 이전에, 전력망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모순적인 장면이 반복된다. 한쪽에서는 전력 부족을 이유로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를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전기를 생산할 준비를 마친 발전소들이 송전망 부재로 가동되지 못한 채 대기 상태에 놓여 있다. 수요와 공급을 연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 송전망이 빠진 채 산업 전략만 앞서가고 있다.
 강원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전경. 송전선로가 확보되지 않아 2호기는 가동을 멈춘 상태로, 굴뚝에서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 진재중
이 같은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송전선로 건설은 지역 갈등과 민원, 정치적 부담 속에서 수차례 미뤄져 왔다. 발전소 건설이 한 지역의 문제였다면, 송전망 구축은 여러 마을과 지자체를 관통하는 과정이다. 그만큼 경관 훼손과 안전 문제, 재산권 침해를 둘러싼 갈등이 반복돼 왔다.

송전망 확충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이 합의가 지연되는 동안, 전력은 생산될 준비만 한 채 현장에 묶여 있다.

그 결과 발전소는 완공됐지만, 전기를 운반할 길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동해안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공간으로 남았고, 그 에너지를 소비할 산업과 정책 논의는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전력은 흐르지 못한 채 멈춰 있고, 지역에는 발전소만 남았다.

전기는 산업의 기본 조건이다. 물류가 고속도로 없이는 작동할 수 없듯, AI와 반도체 산업 역시 송전망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진 전력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 없이는, 국가 전략 산업도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병목을 풀어야 할 곳에서 생긴 또 다른 병목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송전선로. 대규모 발전 설비가 들어섰지만, 전력을 실어 나를 ‘길’은 여전히 병목 상태다. 발전소는 서 있어도 전기는 흐르지 못하고, 동해안의 에너지는 수도권 문턱에서 멈춰 선다.
ⓒ 진재중
동해안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마지막 관문인 하남시 감일동,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이 대체 부지 검토라는 변수로 불확실성에 빠졌다. 이 사업은 HVDC(초고압 직류 송전) 체계의 핵심 축으로 동해안 발전소와 수도권 산업 수요지를 직접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미 공정이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정부가 부지 이전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사업 전반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전력업계는 지금 단계에서 사업을 원점 재검토할 경우, 기존 공사는 매몰 비용으로 남고 HVDC 전체 일정 역시 장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송전망 병목을 해소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새로운 병목을 만들어내는 상황"이라며 "동해안 발전소들은 가동하지 못한 채 유지·관리 비용만 계속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논란의 근본 원인은 발전 능력이 아니라 송전 인프라의 한계에 있다. 전력 생산은 이미 가능하지만, 이를 실어 나를 통로가 막혀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 확인돼 왔다. 그럼에도 정부 대응은 일관된 해법보다는 갈등 관리에 머물며 정책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서울변전소 증설은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 고속도로' 구상의 핵심 사업으로, 이 사업의 지연은 곧 수도권 전력 공급 안정성과 국가 전력망 전략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부지가 변경될 경우, 새로운 민원과 인허가 절차가 뒤따르면서 사업은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동해안 발전소의 저가동 상태는 지속된다. 발전소와 송전설비는 남아 있지만 전력은 흐르지 못하고, 발전을 위해 감내해 온 환경적 부담과 투자 비용만 지역과 국가에 남게 된다. 전력망 특별법까지 마련해 놓고도 기간 전력망 확충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전력업계 안팎에서는 부지 이전 검토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동해안의 전력은 이미 준비돼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추가 검토가 아니라, 결단을 통해 전력을 흐르게 하는 일이다. 송전망의 마지막 연결이 늦어질수록 국가 에너지 전략의 공백 역시 길어지고 있다.

AI와 반도체 경쟁력의 숨은 조건, 송전망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고속도로가 막혀 있다. 전력을 실어 나를 길을 확보하지 못한 채, 동해안의 대형 발전소들은 정상 가동되지 못하고 멈춰 서 있다. 발전 설비는 완성됐지만, 에너지는 여전히 출발선에 묶여 있다.
ⓒ 진재중
에너지 고속도로 없는 에너지 산업은 출발선에 세워진 자동차와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갖췄다 해도, 달릴 도로가 없다면 움직일 수 없다. AI와 반도체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어떤 첨단 산업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이제는 순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발전소부터 짓고 송전은 나중에 고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송전선로와 수요지를 함께 설계하는 통합적 에너지 전략이 필요하다. 전력 생산, 송전, 산업 입지를 하나의 체계로 묶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강원도 동해안에 멈춰 선 전력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 구조의 단면이다. 이 전력이 흐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AI와 반도체 산업도 현실의 속도를 갖게 된다. 지금 동해안에서 멈춰 선 것은 발전소만이 아니다. 국가의 미래 전략 역시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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