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팔레스타인 역사, 그 뒤에 숨은 의외의 원인은?

정환빈 2026. 2. 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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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판 환단고기 ④]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으로 본 역사 인식의 왜곡

[정환빈 기자]

▲ 중동판 환단고기 4편 왜곡된 팔레스타인 역사, 그 뒤에 숨은 의외의 원인은?
ⓒ 정환빈
서점에 가면 재미난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사회 매대에서 두꺼운 책은 거의 어김없이 번역서다. 왜 그럴까. 우리 학자들은 긴 글 쓰기를 싫어해서 그럴까?

정답은 간단하다.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긴 글은 잘 읽히지 않는다. 여기에 독서 인구가 감소하는 악재까지 겹치자, 많은 출판사가 두꺼운 책은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한다. 해외에서 실적이 검증된 인기 서적만 출간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짧은 글은 바쁜 현대 사회의 당연한 변화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번역서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 해외에서는 긴 글을 선호하는 독자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는 짧은 글이 대체할 수 없는 긴 글만의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긴 글은 단순히 더 많은 정보량을 담아내는 도구가 아니다. 사고의 깊이를 달리하기 위한 선택이다. 초등학생 때 읽는 글과 중고등학생 때, 그리고 대학생 때 읽는 글의 길이가 다른 점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짧은 글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제, 혹은 감성적인 주제와 잘 어울린다. 반면, 복잡하고 논쟁적이거나 입체적인 주제에는 긴 글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긴 글을 소비하는 층위가 옅다 보니, 짧은 글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잦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많은 경우, 근거나 과정이 생략되고 주장과 결과만 남는다. 논쟁적인 사안에서는 특정 주장이 확고한 사실처럼 제시된다. 이러한 단순화 과정은 크든 작든 인식의 왜곡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세간에 알려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도 그중 하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을까?

1917년 밸포어 선언은 분쟁의 시작점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던 사실도 분쟁의 원인으로 함께 거론되곤 한다. 외교부의 『팔레스타인 개황』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아랍 국가를 약속했으나, 이후 유대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약속을 이중으로 한 게 중동 문제의 발단이 된다고 기술한다.
▲ 외교부 팔레스타인 개황 뒤에서 살펴보듯, 아랍 국가들에 대한 약속이 아니며, 각서도 아니고, 연도 표기도 부정확하다.
ⓒ 외교부
밸포어 선언에 대한 오독은 앞서 설명했으니, 이번에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한 게 맞는지 점검해 보자. 우리 외교부의 단정적인 서술과는 달리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해 왔다. 다수의 서구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한 영국의 해석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논쟁적인 사안으로 바라본다. 왜 그럴까?

1914년에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식민지 내 8천6백만 무슬림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 지역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반란을 권유해 무슬림 간의 내전을 획책했다. 후세인은 이에 화답하며 1915년 7월 14일에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맥마흔에게 서신을 보내 아랍 지역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후세인이 요구한 영토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면적이었다. 맥마흔은 아라비아반도 이외의 영토는 독립을 논의하기에 이르다고 답신했으나, 후세인은 채근했다. 이에 맥마흔은 외교부의 허가를 받고, 10월 24일에 영국 정부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수정된 경계에서의 독립을 약속했다.

"메르시나와 알렉산드레타 지구(districts), 그리고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지구의 서쪽에 있는 (대)시리아의 일부는 순수 아랍 지역이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제안된 경계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중략)

이 경계 안에 있는 지역들 중 영국이 동맹인 프랑스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곳에 대해서 영국 정부의 이름으로 다음[독립]을 보장하는 답변을 드립니다."

보다시피, 맥마흔은 서신에서 팔레스타인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이 위의 두 예외 조건 중 하나에 해당하는지가 중요하다.

첫 번째 조건은 문구 그대로 읽을 경우 대시리아의 북서쪽 연안 지대만을 제외한다. 따라서 남서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은 독립이 인정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지구를 주나 도시 등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리아의 서쪽에 있는 모든 지역은 독립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옹호한다. 영국의 식민부장관 윈스턴 처칠이 1922년에 처음으로 내놓은 공식 해석도 그러했다.

반대로 두 번째 조건은 독립적으로 문구를 읽으면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있는 지역, 즉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대시리아의 모든 지역이 독립에서 제외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학자들에 의해 널리 옹호되고 있으나, 문맥을 무시한 독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대시리아의 일부"를 제외한 선행조건 등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 어째서 이 문제가 논쟁적인지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진실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1차 사료들이 존재한다. 가령, 맥마흔이 상기 서신을 보내기 직전 영국 외교부와 논의한 문서나, 후세인과 주고받은 이후의 서신에서는 독립에서 제외할 영토로 "북서쪽" 지역만 거론된다.
▲ 맥마흔이 외교부에 보고한 전보(1915) "파루키에 따르면, 프랑스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의 순수 아랍 지구(districts)를 점령할 경우 아랍인들이 무력으로 반대할 것이나, 이 지역을 제외할 경우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제안한 북서쪽 경계에서 약간의 수정이 가능함."
ⓒ British National Archives
게다가 1918년 1월에 영국은 후세인에게 호가스 중령을 보내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자유"를 확약했고, 6월에는 "피치자의 동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또한,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국 외교부는 후세인에게 보낸 서신의 문구를 분석해 "팔레스타인과 관련해서, 영국 정부는 … 이 지역을 아랍 독립 경계 안에 포함하기로 약속했다"라고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 외교부 보고서(1918) 팔레스타인이 독립 지역 안에 포함되었다고 분석했다.
ⓒ British National Archives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구 학자들은 반론을 제기해 왔다. 원문의 문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상호 책무성, 국제법적 성격, 영국의 중동 정책 목표, 밸포어 선언과의 충돌 등 다양한 쟁점을 제기하며 팔레스타인은 독립을 약속받지 않았거나, 실효력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이 문제는 고도화된 연구가 필요한 주제로 바뀌고, 긴 글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단순함을 앞세우다 놓친 것

이-팔 분쟁에 대한 대중의 통념이 학계의 연구로부터 멀어지게 된 데에는 이러한 현상이 주요하게 작용해 왔다. 학자들은 첨예하게 논쟁이 이는 주제에 관해 어느 한 가지 해석이나 자신의 주장만을 단정적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학문적 윤리를 위반하는 행위다. 그러다 보니 해외에서는 여러 핵심 주제가 긴 글의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고, 그 결과 대중에게 널리 전달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국내에서 이-팔 분쟁은 짧은 글이 담론을 주도하면서 해외와는 다른 방식의 서사를 택하게 되었다. 가령 해외에서는 저자가 어떠한 해석을 옹호하든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는지 여부는 논쟁적이라는 점을 밝히지만, 국내에서는 독립을 약속했다고 기정사실로 서술한다.

이 같은 단정적인 태도는 연구에 근간하지 않는다. 후세인과 맥마흔이 주고받은 서신을 읽는 것은 한두 시간이면 되지만, 관련 쟁점을 모두 들여다보는 데는 최소한 수백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팔 분쟁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학자들이 이를 직접 검증해 보았을 리 없다. 기실, 대부분의 학자는 고작 20여 쪽짜리 원문조차 읽어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는 영국의 약속이 '각서'나 '선언' 따위로 잘못 번역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후세인과 맥마흔은 전시에 10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립의 경계와 영국의 경제적 이권 등 여러 사항을 비밀리에 협상했다. 영국은 이를 "Correspondence"로 명명했다. Correspondence는 서신이나 전보, 이메일 등 상호 간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폭넓게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사건의 성격이나 의미, 목적 등을 고려해 단순히 협상으로 의역해도 무방하며, 보다 정확히는 '서신협상'으로 부르면 된다.
▲ 영국 외교부 문서(1939) 영국은 "맥마흔과 후세인 간의 Correspondence(1915년 7월~1916년 3월)"로 명명했다.
ⓒ ProQuest Information
그런데 우리말에는 correspondence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보니 가지각색의 번역이 난무한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번역은 선언이다. 외교부는 각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각각의 서신은 8개월간 이어진 협상의 과정이었고, 그 어떤 서신도 각서나 선언문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특히 선언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함의에서도 잘못되었다. 영국이 일방적으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뒤 철회하는 경우와, 반란의 대가로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협상한 뒤 이를 어긴 것은 정치적 책임의 성격과 무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선언으로 잘못 등재되어 있다.

이처럼 기본적인 연구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대체 왜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다는 믿음이 만연한 것일까? 그 배경에는 바로 '영국이 하나의 땅에 두 개의 국가를 약속해서 분쟁이 생겼다'라는 환단고기가 있다.

중동판 환단고기 연재를 읽어 온 독자라면 이 서사가 틀렸다는 것쯤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애초에 영국은 유대 국가를 약속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1편 참조)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이 서사가 『팔레스타인 개황』에 등장할 정도로 이-팔 분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정설로 믿어지고 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은 단순히 이러한 서사에 맞춰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서사를 퍼트리기 시작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어떠한 발상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팔 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분쟁이 언제 시작되었냐는 질문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리고 밸포어 선언이 시발점으로 지목되니,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게 원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는 왜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 국가에 치열하게 반대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공백을 채워주는 게 필요했고, 그게 바로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이중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명제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영국이 하나의 땅에 두 개의 국가를 약속해서 분쟁이 생겼다'라는 서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다. 이 서사는 너무나도 단순명료해 보이고, 언제나 짧은 글에서만 제시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 학자들이 짚은 밸포어 선언의 정치적 의의는 이중 약속에 있지 않다. 유대인들에게 외면받던 시온주의가 서구 국가들에 의해 유대 민족의 열망으로 공인되고, 그로 인해 아랍-유대 '민족' 간의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는 데에 있다. (2편 참조) 영국의 팔레스타인 독립 약속은 이러한 무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을 뿐,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애당초 시온주의가 시작된 188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은 이미 첨예한 정치적 투쟁의 공간으로 부상해 있었다. 당시 아랍인들이 시온주의에 저항한 것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아랍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전까지 함께 잘 살아오던 유대인을 갑자기 쫓아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환단고기가 분쟁의 초점을 국가 건설로 잘못 부각했을 뿐, 팔레스타인인들은 단지 고향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투쟁했을 뿐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앞으로 긴 글에서 찾아나갈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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