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공연장서 침묵을 강요하지 않았다 [의사소통의 심리학]
엄마와 아기가 사물을 함께 보며 작동하는 공동주의는 언어 습득의 필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빗자루를 가리키며 ‘빗자루’라고 합니다. 아기는 엄마가 가리키는 것을 보며 ‘빗자루’라고 따라서 말합니다. 바닥을 쓰는 동작도 함께합니다. 이름과 기능을 익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 아기가 빗자루에서 파생된 ‘가짜’를 함께 보기 시작합니다. 아기가 빗자루를 가지고 말 타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엄마는 웃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공동주의는 ‘팩트의 공유’에서 ‘상상의 공유’로 진화합니다.
‘무대(stage)’는 가짜를 즐거워하는 놀이를 형식화하고 제도화한 것입니다. 무대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적, 신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지요. 인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무대는 종교 의례와 신화 재연을 위해 만든 장소입니다. 인류학자 리처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에 따르면, 원시적인 놀이는 반복과 규칙을 통해 ‘의례’가 되고, 의례가 오락적 기능을 갖추며 ‘연극’으로 분화됩니다. 시간이 흐르며 공연의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즉 상상의 세계를 공연하는 ‘연극적 무대’가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입니다.
놀이에서 무대가 탄생하는 과정을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마법의 원(magic circl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아이들이 마당에 선을 긋고, “여기부터는 우리 집이야” 하는 순간, 그 선 안쪽은 일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놀이의 공간이 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선이 물리적인 건축물에 자리 잡은 것이 무대입니다. ‘이 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허구이지만, 우리는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는 사회적 약속이 돌로 높인 무대 공간과 조명으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를 ‘공동주의’ 개념으로 풀어보자면, ‘나-너-대상’의 삼항적(triadic) 구조가 ‘배우-관객-허구의 세계’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무대는 ‘관객(나)-배우(너)-서사(대상)’의 삼항관계가 제도화되는 것이지요.

재미의 본질은 ‘또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대 위 가짜 세계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다양한 상황을 간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상의 세계를 자꾸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은 이유는 ‘재미’가 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짜를 재미있어 해야 생존에 유리합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와 직접 싸우면 100% 죽음입니다. 그러나 배우가 무대 위에서 호랑이와 싸우는 것을 안전한 의자에 앉아 구경하면서 나는 ‘죽지 않고’ 대처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다치지 않고 생존에 결정적인 정보를 수집할 때, 뇌는 재미(도파민)를 보상으로 줍니다.
구경의 즐거움에는 ‘거울 뉴런’도 한몫합니다.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 내가 직접 할 때와 똑같은 뇌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죽음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모순적 상황이 묘한 쾌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또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또 하고 싶어지려면, 바로 잊어야 합니다. 재미와 행복의 모순입니다.
쉽게 휘발되는 재미의 특성은 섹스와 같은 직접적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만족스러운 섹스를 해도 그다음 날이 되면, 그 행복한 느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래야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번의 사냥 성공이나 한 번의 섹스로 만족한다면, 그 개체는 더는 사냥도, 짝짓기도 하지 않을 겁니다. 굶어 죽고,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망각은 신이 내린 저주가 아니라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생존의 에너지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섹스가 재미있어서 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그 강렬했던 쾌락이 너무나 쉽게 잊히기 때문에, 그 감각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자꾸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슬픔과 고통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 괴로움의 경험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미래에 닥쳐올 고통(위험)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합니다. 같은 강도의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이 있을 때, 인간은 부정적인 것에 더 강하게, 더 오래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1의 손실을 메꾸려면 약 2~2.5의 이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10만원을 잃었을 때의 우울함은 10만원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훨씬 크고, 대략 20만~25만원을 벌어야 ‘겨우 본전’이라는 느낌을 갖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액수의 이득, 손실이라도, 손실 쪽의 부정적 감정이 훨씬 크다는 것이지요.
참 안 행복해 보이는 표정의 행복전문가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는 상식을 뒤집는 주장을 합니다. 행복과 재미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의 도구라는 것이지요. 행복감을 추구하는 사람은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무대 위의 가짜 세계를 즐거워하듯,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더 좋은 동료, 더 좋은 애인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깁니다. 물론 섹스의 기회도 더 많이 주어집니다. 행복과 재미를 더 많이 느끼는 유전자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합니다. 성공해서 행복하고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행복해야 성공합니다. 그래서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겁니다.
왜 음악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하는 걸까요?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중 전화를 받은 사람 때문에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손해배상 청구까지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질문은 조금 결이 다릅니다. 도대체 우리는 객석에서 조용히 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그 깜깜한 객석에 한번 앉으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꼼짝하면 안 되는 걸까요? 비싼 돈 내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 이상한 공연 문화는 언제 생긴 걸까요?
이른바, ‘조용한 관객(silent audience)’은 19세기 후반에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까지 무대를 함께 보는 관객은 오늘날처럼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관객들은 공연의 리듬과 분위기에 적극 개입하는 ‘공동 공연자(co-performer)’였습니다.
1876년,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극’을 충실하게 구현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개관했습니다. 그는 관객들이 무대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객석의 조명을 완전히 껐습니다. 오케스트라조차 산만해 보인다며 무대 아래로 숨겼습니다. 신분 과시용 박스석도 없애고, 모든 좌석이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부채꼴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관객은 배우와 눈을 맞추지 않게 됐습니다. 배우와 관객의 상호작용을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관객은 이제 숨죽여 무대만을 지켜보는 ‘관음증적 존재(voyeur)’가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둠은 군중을 개별적인 존재로 흩어놓았습니다. 무대를 지켜보며 옆 사람과 감정을 교류하는 군중은 사라지고, 각자 고립된 채 무대라는 미디어에 몰입하는 ‘최초의 현대적 대중’이 탄생한 겁니다.
바그너의 관객은 그래도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자,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각자 가상의 무대에 몰두하는 ‘조용한 관객’은 이제 ‘소외된 관객(alienated audience)’이 되어버립니다. 무대와 관객석의 상호작용은 이제 일방적 소비로 변질됩니다. 관객은 더 이상 무대에 영향을 미칠 권리가 없습니다. ‘소외된 관객’은 무대가 ‘스크린(screen)’으로 바뀌면서 나타난, 지극히 근대적 집단입니다.
소외된 관객의 처지에 관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아방가르드 영화제작자인 기 에르네스트 드보르(Guy Ernest Debord)의 비판은 더 날카롭습니다. 무대에서 격리돼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이란 단지 ‘스펙터클(spectacle)’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은 삶을 직접 사는 대신 구경거리, 즉 스펙터클한 이미지만을 소비할 뿐이라는 겁니다. 자기 노동의 생산물이지만, 자신의 삶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린 ‘소외된 노동’을 하는 현대인들은 이제 현실보다 가상이 더 중요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주체가 아니라 스펙터클한 재미만을 추구하는 수동적 관객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드보르가 전혀 예측 못한 또 다른 형태의 관객이 나타났습니다. 이제까지의 수동적이며 소외의식에 젖어 있던 관객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주 희한한 집단입니다.

21세기 들어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매우 폭력적인 관객이 나타났습니다. 몰려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아냥과 욕설, 폭력을 자행하는 관객입니다. 이들을 나는 ‘포식적 관객(predatory audience)’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 새로운 관객 유형을 이해하려면,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개념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197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정보가 풍요로워질수록, 관심은 빈곤해진다’고 주장합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가 소비하는 것은 인간의 주의력이고, 정보량이 늘어나면 주의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집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인간의 주의력을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이먼의 ‘관심경제’라는 문제 제기는 본격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튀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의 관심이라는 자원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CPM(cost per mille, 광고 1000회 노출당 비용)이나 CPC(cost per click, 광고 클릭 1회당 비용), CPV(cost per view, 광고 1회 시청당 비용)와 같은 지표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최근에는 단순 노출 빈도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봤는가’를 계산해서 가격에 반영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인간의 관심이 제한된 자원이니 효율적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는 사이먼의 문제 설정이 그 희소 자원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해 팔아먹을 것인가로 변질된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고, 공감하는 소통의 시선이 이제 상품이 된 것입니다. 기업과 미디어는 함께 보도록 설계된 우리의 ‘공동주의’ 본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킹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요즘 유행하는, 길어야 수십초짜리 ‘쇼츠’는 그 해킹 방식의 정점입니다. 한번 클릭하면 한두 시간은 그냥 붙잡혀 있습니다. 공동주의의 본질은 시선의 공유에 있지만, 관심경제에서는 시선을 독점합니다.
관심경제의 황폐한 토양 위에 기생하기 시작한 독버섯이 바로 ‘포식적 관객’입니다. 관심경제는 인간의 본능인 ‘부정성 편향’을 상업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분노는 쾌락보다 강하다’는 인간 뇌의 진화적 약점을 악용해, SNS를 위협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쏟아붓게 설계한 것입니다.
SNS의 보상 구조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도덕적 분노로 위장한 콘텐츠는 ‘좋아요’ ‘리트윗’, 댓글을 더 많이 받습니다. 팬덤까지 형성되지요. 이 경험은 콘텐츠 생산자의 도파민 보상 시스템을 자극하고, 갈수록 더 많은 분노 표현을 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무런 성찰 없는 이 같은 행위에 금전적 보상까지 뒤따르지만, 이를 숨기며 정치적, 도덕적 ‘정의’로 포장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 인터넷을 달구는 극좌, 극우의 정치 콘텐츠들과 조폭의 ‘징벌 영상’ 등이 대표적입니다. 트럼프식의 미국 정치와 한국의 ‘팬덤 정치’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공동주의’라는 인류 고유의 공감 능력은, 이제 타인의 파멸을 생중계하며 연대감을 확인하는 ‘집단 사냥’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6호 (2026.02.04~02.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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