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지폐 사건 무죄, 조선일보 유튜브 고쳐라
[서부원 기자]
교육과정의 개정과 연구 성과에 따라 교과서 내용이 바뀌는 게 당연하지만, 역사 교과서는 '무풍지대'처럼 고요하다. 애초 문제 될 만한 내용을 싣지 않아서다. 사료가 미비하고 역사적 관점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사안이 많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극우 편향 교과서 파동 이후 더욱 민감해진 느낌이다.
그런 까닭에 사건의 이름과 장소, 시기 등의 객관적 사실만 적고 해석과 평가 등의 주관적인 내용은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 논쟁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주제로 토론해 보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자나깨나 이현령비현령식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규정을 염두에 둬야 한다. '태정태세문단세'나 '임진왜란 1592'식의 역사 수업이 여전한 이유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로 남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게 문제다. 특히 현대사의 인물과 사건의 경우, 비교적 사료도 많이 남아있고, 현재 우리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안인데도 거론하길 꺼린다. 섣불리 문제 삼았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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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관술에 무기 구형" |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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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당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미군정의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있었고, 그로 인한 자백은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또, 물증으로 제시되어야 할 위폐 실물을 확보하지 못한 점도 무죄 선고의 이유가 됐다. 당시 판결문과 언론 기사 등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로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형이 확정되어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이관술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에 의해 대전 골령골에서 좌익계 인사들과 함께 즉결 처형됐다. 골령골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자 '골로 간다'는 속어의 어원이 된, 통한의 학살터다. 2007년 첫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희생자 규모가 최소 2천구에서 최대 7천구로 추정된다.
이번 무죄 선고의 의미는 이관술의 억울한 죽음과 유가족의 해원(解冤)에 그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의 좌익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법원이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남로당이 와해되고 좌익계 인사들이 대거 월북하거나 지하로 숨어든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기실 남로당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좌익계를 소탕하려는 미군정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해방 후 연이은 실정과 민심 이반의 원인을 남로당에 떠넘기려는 미군정의 얄팍한 술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 등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중의 저항을 좌우의 이념 대립에 의한 혼란인 양 두루뭉수리 규정하는 건 잘못이다.
사건의 영향은 당시로 끝나지 않았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이후 역사 교과서에서 기정사실처럼 서술됐고, 해방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양 묘사됐다. 학창 시절 그렇게 배웠고, 초임 교사 시절 교육과학기술부가 편찬한 국정교과서는 물론, 2010년대 말까지 사용된 일부 검인정교과서에도 공산당의 불법 활동 사례로 적시됐다.
교과서의 내용인즉슨 이랬다. 해방 후 미군정에 반대하던 공산당이 경제적 혼란을 부추길 목적으로 위폐를 대량으로 발행했고, 이를 계기로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했다는 것. 해방 후 민생 경제의 파탄과 혼란의 책임이 미군정이 아닌, 공산당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참고로, 남로당은 1946년 말 해방 후 박헌영 등이 재건한 조선공산당과 경제사학자 백남운이 이끈 남조선신민당, 여운형이 창설한 조선인민당 등 좌익계 성향의 3당이 합당해 만들어졌다. 남과 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김일성의 북로당(북조선노동당)과 합당해 지금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며 남로당 세력은 모조리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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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관술, 일제강점기 감시대상 인물 신상 카드, 1933년, 서대문형무소 |
| ⓒ 위키미디어 공용 |
하지만, 훗날 조작임이 밝혀져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된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비유컨대, 백제의 멸망을 다룰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삼천궁녀 이야기나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다만 이를 문제 삼지 않는 건 사실 왜곡이 끼친 사회적 파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엄연히 정판사 위폐 사건은 그들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장 연좌제의 굴레 속에 '빨갱이의 후손'이라는 낙인을 견디며 모진 삶을 산 유족들이 있고, 무엇보다 해방 후 현대사를 잘못 배운 수많은 국민의 실질적 피해가 엄존한다. 역사는 인과관계로 묶인 까닭에 단 하나의 오류가 전후의 맥락과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통째로 왜곡시킬 수 있다.
이번 이관술에 대한 재심 무죄 선고는 해방 후 현대사 교육의 근본적인 재고와 수정을 요구한다. 만시지탄이지만,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상태로 79년간 아무런 의심도 없이 가르쳐 온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에 대한 서훈이 추진되어야 함은 물론, 해방 직후 좌익계 인사들의 활동에 대한 재평가도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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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 전쟁> '"국민 78% 지지했던 공산주의"의 충격적 실체... '위조지폐'로 대한민국을 장악하려 했었다? |
| ⓒ 호준석의역사전쟁 |
무엇보다 정판사 위폐 사건을 남로당과 좌익계 인사들의 만행으로 단정한 수많은 자료의 폐기가 시급하다. 미군정의 조작 사건임이 드러났는데도 아직 유튜브에선 이를 공인된 사실인 양 주장하는 채널이 적지 않다. 더욱 걱정되는 건, 그런 채널일수록 아이들이 즐겨 찾고, 특히 언론사의 이름을 내걸어 공신력을 뽐내는 영상이 많다는 점이다.
조선일보의 유튜브 채널에서 연재 중인 <호준석의 역사 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유력 언론사와 방송사 앵커 출신이라는 이름값을 앞세워 거짓을 진실인 양 호도하고 있다. 연재물의 첫 번째 주제가 정판사 위폐 사건인데, 해당 영상은 '위조지폐로 대한민국을 장악하려 했었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여담이지만, 이 채널은 한 아이의 소개로 알게 됐다.
영상은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놓았다. 일례로, 해방 후 경제적 혼란 속에 위폐가 횡행했다는 사실과 일제강점기 지폐를 인쇄하던 정판사를 공산당이 매입해 운영했다는 별개의 사실을 묶었다. 해방 후 정판사는 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한 곳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산당은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는 대중 집회를 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을 거라는 추측까지 엮어 위폐 발행을 역사적 사실로 소개하고 있다.
사실의 왜곡도 서슴지 않는다. 미군정이 날조한 정판사 위폐 사건을 되레 공산당이 물가를 폭등시켜 미군정에 대한 민심을 이반시킬 목적이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관술 등 관련자에 대한 고문이 없었다고 단정한다. 화면에서 명백한 증거인 양 보여주는 건, 당시 미군정의 발표를 그대로 옮긴, 전후 맥락이 거세된 조선일보의 기사뿐이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다른 영상을 따라 보면서 아이의 확증편향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과 이를 주변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공유한다는 점이다. 요즘 아이들에겐 '메신저'가 누구냐에 따라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설득력이 달라진다. 나아가 '메신저'의 위상은 '메시지'의 진실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호준석의 역사 전쟁>을 귀띔해 준 아이에게 이번 법원의 재심 무죄 판결 소식을 전했지만, 영상 내용에 대한 신뢰를 쉽게 거두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가 해당 유튜브 채널을 은근히 두둔하며 던진 반문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버젓이 역사를 왜곡하는 영상을 폐기하고 단죄하는 게 시급하다고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다.
"설마 메이저 언론사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더욱이 호준석은 국민의힘의 대변인까지 역임했던 유명 정치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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