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주는 건 없고…’ 재계, 주문서만 내미는 정부에 불만
상법 개정·노란봉투법 부담만 증폭
규제 혁신·배임죄 개선은 지지부진
청와대 호출 때마다 채용·투자 호응
“요구만 하면 소통 아닌 소집” 지적

‘실용적 시장주의’를 내걸고 출범한 이재명정부에 대한 재계의 기대감이 점차 실망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8개월 동안 정부·여당의 주도로 노란봉투법 개정, 릴레이 상법 개정 등 기업 경영 부담을 가중시키는 제도 개편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반면 기업들이 호소해온 제도 보완이나 유예, 배임죄 전면 개편 등 규제 완화와 관련해선 이렇다할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내 투자, 일자리 창출, 대미 관세협상 지원 등 각종 청구서만 내밀 뿐 재계 호소에는 듣는 시늉만 하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취임 직후 5대 그룹 총수와 경제6단체장을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경제의 핵심은 바로 기업”이라며 불필요한 규제들을 과감히 정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와 기업의 ‘원팀’ 정신도 강조했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대통령을 다시 봤다”고 했었다.
이 대통령은 이후로도 한·미, 한·중 정상회담 때 경제사절단을 동행하고 민관합동 회의 등을 개최하며 현안 소통을 이어왔다. 그때마다 기업인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청년 고용과 국내 투자 등을 주문했고 기업들은 적극 호응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국무회의에서 “청년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뿐 아니라 기업 노력도 필요하다”고 언급하자 이틀 만에 삼성과 SK, 현대차 등 주요 그룹들이 줄줄이 채용 계획을 밝힌 건 현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이런 장면은 같은 해 11월 열린 한·미 관세 협상 후속 민관합동 회의, 지난 4일 개최된 10개 그룹 총수 간담회에서도 재방송됐다. 이 대통령이 “대미 투자가 강화되면서 국내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하자 재계는 향후 5년간 총 833조원 규모의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했고, “성장 과실이 더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에는 300조원 지방 투자 계획으로 화답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업들 사이에선 “청와대 호출이 부담스럽다. 이번엔 뭘 내놓아야 할지 겁이 난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5일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자주 만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들어주는 건 없고 요구만 한다면 그건 소통이 아니라 소집”이라고 토로했다.
이 대통령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 검토를 지시한 것 역시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을 키우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일 국무회의에서 기업들의 담합 등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처벌 체계를 신속하게 개선할 것을 지시하며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든지 일정 숫자 이상의 국민들이 모이면 고발권을 주든지 해서라도 풀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공정위는 향후 지자체에 고발권을 분할하거나 민간에 주는 방안 등을 포함해 개선 방안을 신속하게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기업들은 전속고발권이 폐지되면 시민단체나 경쟁업체 등의 고발 남용 등으로 경영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사법 리스크에 늘상 노출되는 부담을 추가로 안을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갈수록 기업 경영 리스크는 커지고 처리해야 할 주문서는 쌓여 가는데, 규제 개선 등에 있어선 여당의 호응이 없다보니 현장의 서운함도 커지고 있다. 재계는 지난해 7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한 1차 상법 개정안 처리 당시 수많은 경영판단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주주들이 소송을 남발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로 인해 신산업 진출이나 인수합병(M&A), 과감한 투자를 주저하게 돼 기업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며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경영판단의 원칙 명문화, 형법상 배임죄 개선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국회는 후속 논의를 약속하고 상법 개정안을 처리했지만 지금까지 진척은 없는 상태다.

정부·여당은 지난해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형법상 배임죄 폐지 계획을 포함한 ‘경제형법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세부적인 대체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8단체는 지난달에도 배임죄 개선을 위한 호소문을 발표하고 관련 건의서를 국회와 법무부에 전달했다.
사용자 범위를 확대하고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계법 2·3조 개정안) 처리 때도 재계는 법 해석의 모호함과 산업 현장의 혼란 가능성 고려해 시행 유예 기간을 6개월이 아닌 1년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8월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6개월의 유예 기간을 거쳐 오는 3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여당은 이에 더해 2월 임시국회에서 자사주 의무소각 의무화 및 활용·처분 규제 강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을 처리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이 대통령이 기업 관련 문제를 다루는 기저에는 그의 오랜 정치 철학인 ‘억강부약’(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과 ‘대동세상’(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재계가 경영권 위축을 우려하는 상법 개정만 해도 소액 주주들에게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계기가 되고 지방 투자와 고용은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소해 장기적으로는 기업 운영에도 긍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 질서의 정상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 대통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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