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동아시아 '지식 플랫폼'…일본산 삼나무에 문명 새겼다
연구소 "단순 전달자 아닌 생산 주체"
일본 서기 파견 기록, 실물로 입증
백제 지식이 일본 고대 문화의 원류

1500년 전 백제는 동아시아의 물자와 지식이 교차하는 '인터내셔널 허브(Hub)'였다.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5일 공개한 목간(木簡) 329점은 백제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흡수해 일본으로 전파한 '지식 플랫폼'이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목간의 재료다. 연구소가 편철 목간의 수종을 분석한 결과, 한반도 자생종이 아닌 일본산 삼나무임이 밝혀졌다. 왕실뿐만 아니라 행정 문서 작성에도 수입 목재를 사용할 만큼 백제와 왜(倭) 사이의 물자 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방국화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고대 문자자료 책임연구원은 "뒤틀림이 적은 일본산 삼나무를 수입해 중요 목간 제작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백제 왕릉의 목관 재료로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목간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을 담겨 있다. 예컨대 '단온병(斷溫病)'이라 적힌 목간에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의학적·주술적 처방이 쓰여 있다.
방 연구원은 "조선시대 '동의보감'이나 일본 의학서 '의심방'에서도 겨울철 잠복했다가 봄에 발현되는 증상을 '온병'이라 했다"며 "단온병이라는 표현과 약재인 '인심초(人心草)' 기록은 백제가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과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번에 발견된 목간에선 시간을 통제하는 기술인 '역법(曆法)'의 수준도 확인됐다. 특히 24절기 중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과 하루를 12시로 나눈 '사시(巳時)' 표기는 국내 최초의 발견이다. 방 연구원은 "백제가 역법을 활용해 절기와 시간을 파악하고, 이를 국가 통치에 이용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백제의 지적 자산은 일본으로 흘러들었다.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은 "목간에 쓰인 글자 형태가 일본의 7세기 목간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에서 만든 한자로 알려진 '전(畑·밭 전)'자도 백제에서 먼저 사용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방 연구원은 "'일본서기'에 554년 백제가 의학박사, 역박사 등을 일본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이번에 확인된 목간들은 그러한 기록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선진 문물을 수입해 넘겨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화하고 체계화한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흙더미 속에서 깨어난 나무 조각들이 백제를 '단순 전달자'에서 '지식 생산의 주체'로 다시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부여=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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