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들 몸 던진 그곳은 결국…영화엔 없는 단종과 영월 이야기

강원도 영월에 들어서면 시간의 결이 슬쩍 바뀐 듯한 착각이 든다. 깎아지른 벼랑과 굽이치는 물길이 맞물려 흘러가는 땅. 왕이었으되 왕으로 살지 못했던 단종(1441~57)의 슬픈 사연이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월의 강과 길, 밥상에 남아 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4일 개봉)’도 영월에서 주요 장면을 촬영했다. 영월에서 단종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육지 속의 섬, 청령포의 오늘

“너구리도 환장해 졸도하는 오지의 섬, 육지 안의 섬 청령포. 여름엔 끈적한 습기가, 겨울엔 강가의 냉기가 올라오는 곳. 최적의 유배지라는 말입니다.”
수백 년이 흘렀지만, 청령포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맞은편 선착장에 서자 ‘육지 안의 섬’이라는 표현이 단번에 이해됐다. 서강이 사방을 휘감고, 뒤로는 산이 옹벽처럼 받치고 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는 배로만 드나들 수 있다. 마침 강추위로 폭 70m의 강이 얼어붙어 있었는데, 나룻배는 쉬지 않았다. 이갑순 문화해설사는 “안전을 위해 아침마다 얼음을 깨 물길을 낸다”고 말했다.

청령포는 유배지인 동시에 기억이 겹겹이 쌓인 숲이다. 숲 안쪽에 단종의 유배기를 증명하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한양을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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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길, 남겨진 능, 사라진 흔적

영월에 이 여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단종대왕유배길’이 조성돼 있다. 영월로 접어드는 첫 길목 솔치재에서 시작해 군등치, 옥녀봉을 거쳐 청령포로 이어지는 44.5㎞의 길이다. 족히 12시간이 걸리기에, 핵심 구간만 걷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배일치재는 한양에 남겨둔 왕비와 어머니를 그리며 절을 올렸다는 자리다. 고갯마루에 단종이 절을 올리는 모습의 석상이 서 있다. 영월 10경 중 하나인 선돌도 유배의 흔적이 서린 현장이다. 이 절벽 아래 천변을 따라 단종이 청령포로 나아갔다.

단종은 청령포가 장마로 침수될 위험에 놓이게 되자 두 달 만에 거처를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겼다. 거기서 두 달 가량을 더 살다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죽자, 엄흥도는 영월 선산 양지 바른 곳에 남몰래 시신을 묻었다.
그곳이 지금의 장릉이다. 묘는 그대로 200년 넘게 방치돼 있다가, 숙종 때야 단종 복위가 이뤄지면서 ‘장릉’이라는 능호를 얻었다. 장릉이 수도권 밖에 자리한 유일한 조선 시대 왕릉이 된 연유다.
단종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는 이후 숨어서 살았다. 이갑순 문화해설사는 “영월을 떠나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 3년상을 치른 뒤 문경에서 은둔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현재 경북 문경에 그를 기리는 충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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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밥상, 어수리 한 상

영월 읍내에 어수리 전문 ‘박가네’가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식사 장면에 쓰인 어수리 요리도 이 집에서 댔다. 이른바 ‘단종의 밥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어수리 더덕 정식(1만8000원)이 인기 메뉴다. 어수리를 활용한 장아찌·인절미·전 등 12가지 찬과 어수리 솥밥이 올라온다. 요즘은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지만, 어수리가 가장 맛 좋은 계절은 역시 봄이다. 박금순 대표는 “4월에 뜯은 어수리는 막 돋은 봄처럼 연하고, 들의 향을 깊게 품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 청령포는 사실 청령포의 모습이 아니다. 청령포 주변이 관광지로 변모한 탓에 촬영 여건이 맞지 않았다. 대신 인근 선돌마을에 세트를 지어 옛 청령포를 재현했다.
영화를 제작한 박윤호 프로듀서는 “전국을 뒤지고 다녔는데, 결국 청령포 옆 선돌마을에 세트를 차렸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길, 육중한 산세가 청령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고 말했다. 건너편 소나기재 전망대에서 선돌마을과 서강 그리고 선돌이 어우러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배길에 단종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은 영월 어라연에서 촬영했다. 물길 옆으로 기암절벽이 솟은 천혜의 장소다. 동강의 명물 판운리 섶다리도 유배길의 무대가 됐다.

영월=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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