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원 교수의 신학하는 마음] 거친 손과 흙 묻은 얼굴, 덧없는 삶에 덧입힌 영원의 색채

2026. 2. 5.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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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빈센트 반 고흐,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이다. 왼쪽부터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소장한 1888년작 ‘씨 뿌리는 사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1885년작 ‘감자 먹는 사람들’. 국민일보DB


빈센트 반 고흐 하면 대개 강렬한 색이 먼저 떠오르지만, 제 기억에 오래 남는 건 그의 작품에 등장하던 손이었습니다. 일하고 얼굴을 감싸고 씨를 뿌리던 손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무엇보다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닿습니다. 애틋하다는 말은 참 묘합니다. 사랑이지만 뜨겁지 않고, 연민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지요. 잘나서가 아니라, 사라질 것 같아 더 조심스레 붙드는 마음. 고흐의 그림에는 이 마음이 늘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길은 수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말은 그냥 생각이 아니라, 그가 몸으로 오롯이 살아낸 선택이었습니다. 한때 그는 목회자가 되기를 꿈꾸며 보리나주 탄광촌으로 들어갔습니다. 광부들과 같은 바닥에서 지내며 가진 것을 나누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견디려 했지요.

그가 일본 판화에 매료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더 깊이 배운 것은 피었다가 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미학이 말하는 ‘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 즉, 사물의 덧없음과 애잔함을 알아차리는 감수성에 가까운 마음결이지요. 아름다움은 오래 버티는 데 있지 않고, 사라지기 직전의 떨림 속에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그 떨림을 붙들어 두려는 마음이 결국 손끝에 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고흐는 곧장 되묻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라지는 시간은 하나님께도 덧없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색은 어둡고 얼굴은 거칠고 방에는 빛보다 그늘이 짙습니다. 그런데도 이 그림 앞에서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얼굴만큼이나 일하는 손에 시선이 오래 머물지요. 고흐는 이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등잔불 아래 감자를 먹는 이들은, 지금 그릇에 손을 넣는 바로 그 손으로 직접 땅을 갈아엎어 왔던 사람들이지.” 미화도 없고 동정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삶을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는 진지함이 배어 있습니다. 덧없음을 알수록 그는 더 천천히, 더 무겁게 그렸습니다. 그가 그려낸 어둡고 투박한 손은 그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 존엄의 표지였습니다.

스위스 쿤스트하우스 취리히가 소장한 1889년작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국민일보DB


고흐 연구가 안재경은, 고갱이 실재의 추상성을 좇았다면 고흐는 실재의 상징성을 붙잡았다고 구분합니다. 고흐는 현실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감자 냄새가 배어 있는 방, 거칠어진 손, 그늘이 짙은 얼굴을 그대로 남겨 두었지요. 그리고 그 현실 안에서 의미가 스스로 솟아오르도록 둡니다. 그림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육신과 성찬이 떠오르기 마련이지요. 하나님은 관념으로 오지 않고 그을린 살과 감자처럼, 곧 흙과 땀의 자리로 오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갱이 현실을 형식으로 바꿔 의미를 세우려 했다면, 고흐는 현실 안에서 의미를 직접 길어 올리려 했던 것이지요.

이 차이는 고흐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목사는 되지 못했어도, 설교의 언어 대신 그림의 색을 택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우리에게 오셨듯, 덧없는 삶일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귀하다는 사실을 말이 아니라 색으로 고백했던 것이지요. 그 마음이 가장 깊게 드러난 작품은 ‘영원의 문턱에서’일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한 노인. 그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지금의 버거운 시간을 끝까지 통과하려고 그 자리에 앉아 있지요.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 자세는 “끝까지 견디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단순한 비탄이라기보다 영적 무게를 머금은 화폭. 고흐에겐 이런 순간을 붙잡아내는 일이 신학을 더 깊게 만드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1890년작 '영원의 문턱에서'. 국민일보DB


고흐는 심지어 이런 비유까지 남깁니다. “루앙으로 가려 기차를 타듯, 별로 가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탄다.” 증기선과 기차가 교통수단이듯, 콜레라나 결핵 같은 병도 ‘별에 이르는 교통수단’이 아닐까 했지요. 그의 편지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거칠고 생생한 비유입니다. 죽음마저 단절이 아니라 문턱의 언어로 삼아, 영원에 가닿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에게 영원은 도피가 아니라 통과였습니다. 여기서 고흐가 그려내고 싶었던 영원은 시간을 지워버리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덧없는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깊이에 가까웠습니다. 모노노 아와레가 사라짐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면, 그가 소망하던 영원은 그 사라짐을 끝내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지요.

‘씨 뿌리는 사람’에 이르면, 그 조화가 더 분명해집니다. 농부는 작고, 태양과 땅은 큽니다. 씨를 뿌리지만 결실은 보이지 않지요. 그래도 그는 뿌립니다. 이 연작이 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영원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고, 덧없는 오늘을 향해 손을 내미는 노동 속에서 자란다고. 그는 현실의 땅과 빛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노란 하늘과 보랏빛 밭의 대비는 덧없음과 영원의 관계를 마치 손끝에 닿는 듯하게 하지요.

이토록 고흐의 애틋함은 끝내 꺼지지 않습니다. 덧없음을 미학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저 살아냅니다. 사라질 것 같아 더 조심스레 돌보는 삶을. 이렇듯 고흐의 신앙은 단순합니다. 사라지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것 하나였지요.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세상의 어떤 덧없음도 허무가 아니라 기도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고흐는 묻습니다. 우리의 손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송용원 장로회신학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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