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통하게 죽은 이들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형숙' [민병래의 사수만보]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
|
| ▲ 국가폭력피해자 유가족들이 29일 국회에서 열린 제431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이 가결되자 기뻐하고 있다. 2026.1.29 |
| ⓒ 연합뉴스 |
이형숙은 국회 본청의 방청석에서 이 장면을 숨죽여 지켜봤다. 지난 2년간 그는 김광동·박선영의 퇴진과 '진실·화해위원회 3기'의 출범을 위해 애써왔다. 용산 대통령실과 국회, 퇴계로의 진실·화해위 사무실을 오가며 기자회견과 일인 시위, 성명 발표를 했다. 최근 6개월은 매주 화목토 아침 7시부터 8시 30분까지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2024년의 12·3 내란 때처럼 이번 겨울도 힘들었다. 여의도 샛강의 칼바람은 뺨을 할퀴며 목도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볕을 쬐고 있어도 살얼음이라도 낀 듯 발가락이 쩌릿했다. 함께 행동하는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유족회'(이하 유족회) 회원들은 나이가 많아 몸이 더 시릴 터이니 바라보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형숙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 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의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다. 추모연대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750여 명의 열사를 기리고,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고자 1992년에 결성되었다. 그런 추모연대의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이형숙의 몸은 몇 개라도 모자란다. 이한열이나 박종철처럼 누구나 아는 이름이 있지만 군에서 프락치 강요를 받다 숨진 한희철처럼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해마다 기일은 돌아오고 추모제를 지내야 하니 마석과 이천, 광주 등 이형숙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행사가 겹치기 일쑤여서 남에 번쩍 북에 번쩍해야 한다.
|
|
| ▲ 한희철추모제에서 발언하는 이형숙 이날 추모제는 2024년 12월 8일 마석민주공원에서 열렸다. |
| ⓒ 민병래 |
한편, 민보상위의 뒤를 이어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도 대처할 문제가 많았다. 두 위원회는 모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와 추모연대가 422일 동안이나 농성해 이룬 성과였다. 당시 요구는 선명했다. "왜 죽었는지 밝혀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라"는 두 가지였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두 개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민보상위는 보상 체계에 결함이 있었고 의문사위는 조사 권한이 미약해 과연 안기부나 보안사 같은 권력 기관을 상대로 진실을 제대로 밝혀낼지 불투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모연대'가 역량 강화를 꾀할 때 이형숙은 상근자로 합류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이형숙은 성공회대 민주기념관의 연구원으로 또 석박사 과정에 들어가 공부한 기간 외에는 추모연대와 함께 웃고 울었다.
|
|
| ▲ 진실화해위 앞에서 박선영임명규탄기자회견 왼쪽에서 사회를 보는 이가 이형숙 집행위원장이다. |
| ⓒ 민병래 |
김광동은 2023년 6월 9일 영락교회에서 '6·25전쟁, 한국기독교의 수난과 화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한 피해에 대해 1인 당 1억 3200만 원의 보상을 해주고 있다. 심각한 부정의다"라고 말했다. 또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에서 피난민 250명을 학살한 노근리 사건에 대해 "전쟁 중 부수적 피해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이 증거 없이 적법 절차도 밟지 않고 학살한 민간인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발언이었다. 김광동은 또 2023년 국정감사에서 "북한군이 5·18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발언했고 제주 4·3 항쟁을 "공산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폭동"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피학살자와 4·3 사건의 유족, 5·18 피해자 등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국가 폭력 피해자에게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퍼붓는 듯했다.
이형숙은 김광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영락교회 발언 직후인 6월 18일 이형숙은,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이하 범국민연대)와 진실화해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광동 사퇴를 촉구했다(범국민연대는 김광동의 진실화해위가 유족회나 삼청교육대 등 모든 피해자 단체를 갈라치기하고 수사기관처럼 심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맞서기 위해 2023년 결성된 단체다).
기자회견 뒤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7월 2일, 이형숙은 범국민연대 회원들과 김광동 위원장 방 앞으로 몰려갔다. 그가 만남을 거부하자 이형숙은 팔순, 구순 노인들과 함께 복도에 눌러앉았다. 다음 날엔 진실화해위의 '퇴거 요청'을 받은 경찰에 일부 회원이 중부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하였다. 이형숙은 붙들려간 이들의 석방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강한 바람에 많은 비까지 내리는 7월 18일에는 용산 대통령실 앞으로 달려가 김광동 파면을 다시금 요구했다.
12·3 내란 이후에는 더욱 바빴다. 친위 쿠테타가 실패했는데도 윤석열이 김광동의 후임으로 박선영을 임명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석열 탄핵 투쟁에 동참하면서 박선영 임명 철회 투쟁, 출근 저지 투쟁을 진행했다. 이형숙은 4월 4일 윤석열이 탄핵 당하고 나서도 박선영이 물러나지 않자 범국민연대 및 시민단체와 머리를 맞댔다. 2025년 11월 말로 2기의 법적 활동 기한이 끝나니 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전부 개정하여 더 강력한 진실화해위 3기를 만드는 것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이미 202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이 되면서 '전부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였다. 그는 용혜인·김성회 등 여러 의원과 더욱 활발하게 접촉했다. 형제복지원이나 선감학원 피해자는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 결실이 1월 29일 본회의 통과로 나타난 것이다. 2025년 11월 27일 행정안전위를 통과하고 12월 3일 법사위를 통과했을 때 한시름 놓았지만, 해를 넘겨 2026년에 이르자 초조한 마음이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권한 강화를 민주당 측과 협의할 때 일부 국회의원의 보수적 태도에 놀란 터라 혹 돌출 변수가 나오지 않을까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번 개정안은 성과가 크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에 고문과 구금이 추가되었고 형제복지원 같은 수용 시설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 사건은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전까지로 조사 기간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진화위에 "영장 청구와 수사 의뢰 권한"이 주어진 것은 의문사위를 포함 역대 과거사 기구에 없던 획기적인 변화다. 그동안 정보·수사 기관의 벽 앞에서 진상규명은 가로막혔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료가 없다, 폐기했다고 했다. 특히 국정원은 "희망 키워드를 제출하면 이를 자체 조사해 보고 답변하겠다"라는 식이었다. 돌아온 답은 어김없이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이형숙은 돌아가면서 경찰청·방첩사·국정원으로 달려가 자료 공개를 외쳤다. 오랫동안 이어온 싸움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사 권한 강화는 매우 의미 있는 개정안이었다. 또 반역사적인 인물의 취임을 봉쇄하기 위해 위원장 탄핵소추 조항을 신설한 것도 큰 변화였다.
|
|
| ▲ 추모연대 사무실에서 이형숙 그는 전태일기념사업회와 추모연대에서 30여 년 활동했다. |
| ⓒ 민병래 |
이형숙은 전태일 사업회 일을 하면서 '사람세상'이란 소식지를 매달 만들어 영화 제작 후원자 2500명에게 보내는 일에 공을 들였다. 서류 봉투는 우편 요금이 비싸, 소식지를 몇 차례 접어 편지 봉투에 넣어 보냈다. 매달 15일경, 이형숙의 호출을 받은 선·후배가 밤새 애쓴 덕분이다. 1997년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했을 때 한 달 후원비가 고작 9만 원이었으니 사업비며 운영비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마른 수건을 짜듯 살아야 하니 우편 요금도 버거웠다. 옮겨간 추모연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태일 사업회 같은 회원 조직의 재정이 안 좋으니, 추모연대로 올리는 회비가 들쭉날쭉하였다. 20여 년 세월 추모연대의 짐을 들고 옮겨 다닌 곳이 두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평동, 합정동, 공덕동 등을 거쳐 지금 광화문에 둥지를 틀었으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건물이다. 찍어내는 자료집과 행사 물품이 좀 많은가? 모든 택배 아저씨에게 기피 대상 1호로 꼽히는 곳이다.
이형숙은 학생운동에 발을 디딘 이래 30여 년 동안 현장을 지켰다. 성공회대에서 박사 과정을 하느라 잠시 외도(?)했던 기간을 빼고 말이다. 이형숙은 2007년 평양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돌아왔을 때 평양 시민의 입성과 캄캄한 거리 풍경이 그의 눈 언저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이형숙은 평양의 잔상 때문인지 불현듯 공공 정책을 공부하고 싶었다. 2008년 성공회대 석사 과정에 들어가 낮에 추모연대 일을 하고 밤에는 책에 매달렸다. 대학원 2학기를 마치고 3학기에 들어갈 즈음인 2009년 1월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대책위에서 유가족 지원 사업을 담당하게 되면서 그는 대학원을 휴학했다. 모든 싸움에 애로가 있으나 세월호나 이태원 같은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이른바 '장례 투쟁'은 무척 힘들다. 용산 철거민 투쟁 때도 그랬다. 너무나 엄청난 상황을 맞닥뜨리니 유족은 정신이 없다. 주변은 다 의심스러울 뿐이다. 사돈의 팔촌까지 경찰 정보 계통이 가동되어 빨리 장례 치르라고 압박이 들어온다. 이런 분위기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고 싸움의 방향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유족과 함께하는 일은 어떤 사업보다 힘들다. 한 학기면 되겠지 싶었던 용산 참사 대책위 활동은 사건 발생 1년 후 장례를 치르고서야 끝났다.
|
|
| ▲ 이형숙 |
| ⓒ 이형숙 |
이형숙은 추모연대를 사직하고 2015년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장벽이 높았다. 스페인어로 쓰인 자료를 봐야 하는데 늦깎이로 언어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천년에 전문 자료를 볼 정도로 어학 수준이 높아질지도 막막했다. 이형숙은 고민 끝에, 한국군의 대표적인 의문사 중 하나인 허원근 사건을 연구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추모연대의 중심 사업인 '의문사진상규명작업'의 학술적 토대를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허원근 일병의 부친이 기울인 눈물겨운 노력도 마음의 빚이었다. 부친은 사건이 발생한 1984년부터 30여 년간 국방부와 헌병대를 상대로 씨름했고, 이형숙은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왔던 터였다.
허원근은 1984년 4월 2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 제7사단(칠성부대) GOP 철책 근무지에서 3발의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7사단 헌병대는 조사 끝에 허 일병이 M16 소총으로 가슴을 두 번, 머리를 한 번 쐈다고 발표했다. 유족은 반발했다. 가슴에 총을 맞아 중상인데 다시 머리를 쏜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1기 의문사위는 조사 후 "술 취한 부사관이 허 일병을 사살했고 군 간부가 이를 자살로 조작·은폐했다"라고 발표했다. 의문사위의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그런데 국방부는 의문사위의 활동이 종료되는 시점에 국방부 특별조사단을 꾸리고 자체 조사를 벌여 의문사위의 결론을 뒤집었다. 다시 자살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2004년 2기 의문사위는 국방부의 주장을 반박하고 재차 타살임을 확인했다. 사건은 법정으로 옮겨졌다. 1, 2심을 거쳐 2015년 상고심은 "자·타살을 결정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국가는 부실 수사에 대한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결정했다. 사건 발생 31년 만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로 이 사건은 겉으로는 마침표를 찍었으나 여전히 진행형인 '의문사'였다.
이형숙은 허원근 사건과 씨름했다. 헌병대의 수사기록, 의문사위가 확보한 증언, 또 국방부 특조단이 내세운 논리를 읽고 또 읽었다. 어떤 날은 자료와 씨름하며 새벽을 맞기도 했다. 이형숙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의 연구원으로 이후에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논문을 써야 할 시기가 오면서 그의 마음은 바빠졌다. 전념해도 쉽지 않은 박사 과정에 생계 노동을 같이하긴 무리였다. 이형숙은 배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빚더미에 올라도 결실을 봐야 했다. 5년을 고생한 끝에 2020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허원근 사망을 둘러싼 한국군의 대응을 '부인의 역사'라고 이름 지었다. 진실 규명과 부정이 반복되는 과정을 자신의 언어로 정의한 것이다.
|
|
| ▲ 성균관대 민족민주열사 추모제에서 발언하는 이형숙 2025년 10월 19일에 열린 추모식이다. |
| ⓒ 민병래 |
그렇기에 1월 29일 국회 전광판을 메운 168개의 녹색 빛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위로하는 온기로 느껴졌다. 우원식 의장이 가결을 알리며 내리치는 망치 소리는 자신과 '범국민연대' 동지들을 향한 격려의 박수 같았다. 그는 함께 방청한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국회 앞에서 '과거사정리법 개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과거사 기구가 될지도 모르는 3기 진실화해위가 소임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과제가 이형숙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미터 폭설은 옛말... 겨울 가뭄·산불 경고에 긴장한 강릉·동해안
- 1163자 장문 트윗한 이 대통령 "언론, 왜 망국적 투기 편드나"
- '실리콘밸리의 양심' 트리스탄 해리스 2월 한국 첫 방문
-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자동차로 떠나는 수도권 '하루 2섬' 여행
- "국민의힘 X판 됐다"... 조갑제 "딱 좋은 당명 있다"
- 임진왜란 최대 성과, 왜군 막은 금산 군수의 전술
- 죄인 처벌해달라는데 "돈 받았잖아" 되물은 판사, 이래도 되나요?
- 1.3조 천무 계약... 강훈식 "캐나다에선 5성급 호텔 잠수함 환경 강조"
- 유명 작가 사인회도, 굿즈도 없는 논픽션 도서전, ''텍스트힙'이 여기 있네'
- 김정관 "불필요한 오해 해소됐다 생각... 국회 계류 굉장히 아쉬워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