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사랑은 과메기를 타고

2026. 1. 31. 00:3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면 유니클로에서 산 자주색 모크넥 티셔츠와 언니에게 얻은 청바지를 입는다. 너무 갖춰 입은 것 같지 않으면서도 그리 후줄근해 보이지도 않는 자연스러움이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이 착장을 유지한 지 오 년쯤 되었다. 이 글에 딸린 프로필 사진 속 상의가 그 증거다. 스티브 잡스처럼 시간을 아끼려 같은 옷을 입는 건 아니다. 그저 옷 살 돈이 아까워서 고집을 부리는 것뿐이다. “얘, 제발 옷 좀 사 입어.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아껴, 아끼기는!” 엄마는 자주색 모크넥 티셔츠를 입은 나를 볼 때마다 가슴을 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요지부동이다. 내 유전자에는 아빠의 구두쇠 기질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짠돌이로 평생 나이키 신발을 사 본 적이 없을 만큼 인색한 사람이다. 이런 아빠에게, 막내딸인 내가 집을 사는 데 돈을 보태 주라는 엄마의 닦달은 칠십 평생 최대의 위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엄마는, 애가 시집도 못 가고 저러고 있는데 집이라도 한 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아빠를 설득했다. ‘저러고’ 있다는 게 당최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러고 있는 내가 아빠 눈에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돈이 통장에 입금된 걸 보면 말이다. 아빠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안다. 짠돌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돈을 나에게 줬다는 건 막내딸 역시 그만큼 아낀다는 뜻일 터이다.

천 냥 빚도 말로 갚는다는 옛말이 있다. “고마워” 한마디에 삼백 냥, “사랑해” 한마디에 삼백 냥, “효도할게” 한마디에 사백 냥. 세 마디 정도면 빚 청산이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잘 쓸게” 하는 무뚝뚝한 외마디였다. 가치로 따지자면 열댓 냥 남짓 될까. 아빠에게 큰 빚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부모와 자식 간에 빚을 지고 말고가 어디 있느냐고 했지만 엄마는 모르는 짠돌이 짠순이만의 세계가 있다. 새집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자려면 남은 구백팔십오 냥을 갚아야만 했다. 하지만 때려 죽여도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열심히 일해서 갚는 방법뿐이었다.

나는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글을 썼던 도스토옙스키처럼 밤낮없이 키보드를 두드렸고, 그 결과물로 어린이 학습 만화책을 출간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은 아니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학부모 지인에게 만화책을 선물한 대가로 과메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과메기를 보내준다는 지인의 말이 달갑지는 않았다. 마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어린애 입맛을 벗어나지 못해 과메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과메기는 겨울이 제철이니 이번 기회에 먹어보라는 권유를 거절했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다. 마른 김에 과메기를 싸 먹으니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고소한 세계가 입안에서 펼쳐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형부에게 연락이 왔다. 형부도 지인에게 과메기를 선물 받았는데 양이 많으니 같이 먹자는 소식이었다. 아니, 이게 웬 과메기야! 태어나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던 과메기가 올해 들어 자꾸만 굴러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 모두가, 겨울에는 과메기가 맛있다는 사실을 아는 입맛 까다로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맛있는 과메기를 가까운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는 다정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서로라는 진리를 깨달은 성숙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겨울이 되면 과메기로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모양이다.

형부네 집에서 과메기를 먹고 집에 가는 길,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과메기를 배불리 먹었다는 나의 말에 투덜거렸다. 자기는 올겨울에 과메기 구경을 해 본 적도 없다나 뭐라나. 오호라, 그거참 잘됐다! 당장에 고향집으로 과메기를 보냈다. 미식가인 아빠 입에 과메기가 맞을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아빠가 끼니때마다 과메기를 찾는다는 반가운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아빠에게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보내는 것으로 이자를 치를 셈이다. 그 음식에 나의 사랑과 감사가 담겨 있음을 눈치 빠른 아빠는 알 것이다. 그나저나 세상에 이렇게 이율 낮은 이자가 어디 있느냐고? 아빠 닮아 짠순이인 걸 어찌하오리까.

이주윤 작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