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을 바친 35년, 당신에게 맡깁니다

29일 인천 부평구. 지어진 지 20여년 된 교회 내부엔 거친 드릴 소리와 함께 뿌연 먼지가 날리고, 목재에 못을 박는 데 쓰는 타카총 소리도 연신 탕탕거렸다. 뜯어진 바닥부터 등도 켜지지 않는 천장까지 파헤쳐진 내부는 이 교회의 대대적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다.
한데 이 교회 담임목사는 아직 정식 위임 예식도 치르지 않았다. 이달 담임으로 부임한 그가 후임 목회자로 부임한 기간도 불과 1년 반. 35년 역사를 가진 교회의 리모델링을 주도하기엔 다소 이른 시점처럼 보였다.
‘후임 목사는 주보 한 장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말이 농담반 진담반처럼 전해지는 교계. 보통의 경우라면 엄두도 못 낼 이 과감한 공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배경을 이해하려면 청빙 과정부터 들여다 봐야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2024년 5월이다.
예본교회를 개척해 35년 가까이 강단을 지켜온 조환국 원로목사가 청천벽력 같은 뇌종양 판정을 받은 건 그때였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대수술을 3주 앞두고, 조 원로목사는 평소 교류하던 한소망교회 류영모 목사에게 “2대 담임목사를 단어 그대로 청빙(請聘)하고 싶다”며 “좋은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청빙은 ‘부탁해 부른다’는 뜻이다.
류 목사는 한소망교회 부교역자인 이현일(45) 목사를 추천했다. 마침 조 원로목사의 사위도 “이현일은 제 신학대학원 동기인데 믿을 만한 친구”라며 이 목사를 추천했다. 그렇게 설교 한 번 들어보지 않은 채 예본교회 후임자가 결정됐다. 교회의 청빙 요청에 이 목사는 당시 진행 중이던 대형교회 청빙 절차를 모두 중단하고 연고도 없는 인천으로 왔다. 이 모든 일이 2주 만에 진행됐다.

그렇다고 ‘묻지 마 청빙’이 ‘묻지 마 신임’으로 곧장 이어진 건 아니다. 낯선 후임자가 자신의 목회 비전과 진심을 교인들과 나누고, 투병 중인 원로목사가 안심하기까지 교회엔 반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목사는 부임 직후부터 만나는 사람과 심방 내용, 퇴근 후 일정 등 세세한 목회 일지를 문자로 적어 조 원로목사에게 매일 보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이 목사는 “원로목사님께 예본교회는 평생을 바쳐 기른 자식과도 같다”며 “후임자가 들어와 이곳저곳을 손댈 때, 내색은 못 하셔도 불안하실 수 있다. 사역의 작은 부분까지 투명하게 공유하는 게 후임자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 원로목사는 후임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1년 6개월의 동사목사 기간, 조 원로목사는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강단에 단 한 차례만 섰다.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달엔 아예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예본교회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개척 후 35년간 피땀으로 일군 교회지만, 자신의 존재가 새 리더십에 부담이 될까 봐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은퇴식 날 그는 목회의 전권을 넘겨준다는 의미로 교인들 앞에서 이 목사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가능했던 배경엔 두 목회자가 공유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이 목사는 이를 ‘목회의 트라이앵글’로 소개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②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가 ③ 말씀에 근거한 변화인가. 이 목사는 “이 세 가지 꼭짓점이 맞닿으면, 원로목사님께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강단에서 흐른 두 목회자의 끈끈한 신뢰는 성도들에게도 흐르고 있다. 이번 리모델링 공사가 그 증거다. 인테리어업에 종사하는 장로들이 생업을 잠시 내려놓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외부 업체에 맡기면 수천만 원이 들 공사지만, 장로들의 재능 기부로 자재비만 들여 진행하고 있다. 주일 예배를 앞둔 토요일엔 성도들이 함께 공사 현장의 먼지를 닦아낸다.
하드웨어인 건물이 새로워지는 사이 목회 시스템도 대대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기존의 관리 중심 조직인 구역은 삶을 나누는 관계 중심의 소그룹인 목장으로 개편됐다. 주일 오후 예배도 찬양 예배 대신 담임목사와 함께하는 소그룹 예배로 전환해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최근엔 영화관을 빌려 영화 ‘신의악단’을 단체 관람하는 등 교회 문화를 유연하게 바꾸는 파격적인 실험도 이어지고 있다.
교회 안팎을 아우르는 모든 변화가 잡음 없이 안착할 수 있었던 이면엔 원로목사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이 목사는 든든한 울타리가 돼준 조 원로목사에게 연착륙의 공을 돌렸다.
“원로목사님은 제 목회의 가장 든든한 백이자 버팀목이세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하라’며 응원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그 사랑 덕분에 이렇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35년이 교회를 이루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35년은 복음의 영향력을 펼치는 시간이 될 거에요. 하나님과 원로목사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예본교회의 멋진 2막을 열어가겠습니다.”

인천=글·사진 이현성 기자 sag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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