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 의자'를 만난 날 받은 묵직한 가르침
[전갑남 기자]
|
|
| ▲ 파란 하늘 아래 단아하게 자리 잡은 길상사. 소유보다 더 큰 비움의 가치가 머무는 곳이다. |
| ⓒ 전갑남 |
법정 스님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은 김영한 보살은 '시인 백석의 시 한 줄이 1000억 원의 재산보다 귀하다' 말하며 모든 것을 비워냈다. 시주 요청을 10년 가까이 밀어냈던 법정 스님과, 그 거절을 기도로 견뎌낸 보살의 인연은 '소유'보다 더 큰 '기다림'의 가치를 보여준다. 지난 27일, 그 고결한 비움의 미학이 서린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의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스님의 자취가 가장 깊게 배어있는 진영각을 먼저 찾았다. 깨끗이 비질된 '무소유의 길'을 따라 오르는 동안, 일상의 번잡함이 하나둘 털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진영각 문은 닫혀 있고, 툇마루에는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어 고요한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그 툇마루 한편에서 정갈한 옷차림의 두 여성 분이 머뭇거리는 내게 말을 건넸다.
|
|
| ▲ 햇살이 머물다 가는 진영각 툇마루, 스님의 청빈한 삶이 고요한 정적 속에 배어 있다. |
| ⓒ 전갑남 |
진영각에는 스님의 영정과 삶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분이 언급한 낡고 해진 법복은, 그 어떤 화려한 설법보다 강렬하게 '청빈'의 의미를 웅변하고 있다. 두 분은 일주문 앞 갤러리 '스페이스 수퍼노말'에서 열리고 있는 '붓장난' 전시를 꼭 보라 권하며 자리를 떴다.
|
|
| ▲ 길상사 일주문 바로 맞은편, 스님의 소박한 필묵이 기다리는 전시 공간 '스페이스 수퍼노말'. |
| ⓒ 전갑남 |
"네. 흔히 '빠삐용 의자'라고 부르지요.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는 '인생은 자유로워야 한다'며 산에서 직접 땔감 나무로 만드신 거예요."
|
|
| ▲ "인생은 자유로워야 한다."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드신 투박한 의자 하나에 스님의 철학이 오롯이 담겼다. |
| ⓒ 전갑남 |
"물을 움켜뜨니 달이 손 안에 있고, 꽃을 만지니 향기가 옷깃에 스미네. 먹이 남아서 붓장난했네."
겸손하게 '붓장난'이라 이름 붙였지만, 자유롭게 흐르는 선들 속에는 스님의 올곧은 성품과 맑은 영혼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맑은 먹향을 타고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
|
| ▲ "먹이 남아서 붓장난했네." 기교 없는 선 속에 흐르는 스님의 맑고 올곧은 성품. |
| ⓒ 전갑남 |
"스님, 멀리 계셔도 늘 곁에 계신 듯 느껴집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스님의 맑은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편지 중)
이에 화답하는 법정 스님의 편지 속 문장들은 한 편의 시처럼 다가왔다.
"수녀님, 산에는 벌써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내 본래의 마음을 찾아가는 길에 수녀님의 기도가 큰 힘이 됩니다. 맑고 향기로운 날들 되시길 빕니다." (법정 스님이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중)
|
|
| ▲ 서슬 퍼런 수행자의 외피를 벗은 한 인간의 정직하고 인간미 넘치는 고백들. |
| ⓒ 전갑남 |
"오늘처럼 추운 날은 부엌에 내려가기가 죽으러 가는 일 만큼이나 머리가 무겁네."
수행자라는 엄격한 외피를 한 겹 벗겨내자, 그 자리에 추위와 일상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한 인간의 맑은 영혼이 서 있었다. 여러 '붓장난' 속 묵화에는 거창한 진리보다 뜰 앞에 핀 꽃 한 송이, 우려낸 차 한 잔에 감동하는 스님의 섬세한 감수성이 담겨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는 맛"이라고 속삭이는 듯한 문장들은, 스님을 엄격한 수도승이 아니라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처럼 가깝게 느끼게 했다.
|
|
| ▲ 차 한 잔의 소박한 즐거움. 거창한 진리보다 일상의 작은 감동을 아꼈던 스님의 마음. |
| ⓒ 전갑남 |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면, 차라리 그것이 없던 때보다 못한 것이다. '빠삐용 의자'에 앉아 고요히 먼 산을 바라보던 스님의 뒷모습은, 바로 그 불필요한 집착에서 벗어난 최고의 자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진영각의 정갈한 비질 소리부터 각별한 인연, 그리고 '빠삐용 의자'에 담긴 묵직한 가르침까지. 이번 여정은 소유에 지친 우리에게 '덜어냄의 미학'을 선물해 주었다. 성북동 산자락에서 마주한 스님의 '붓장난'은, 올겨울 내 마음속에 가장 맑고 깊은 향기로 남을 것 같다.
[전시 정보]
<우리 곁에 법정 스님 '붓장잔'>
기간 : 2026년 1월 19일 ~ 3월 21일
장소 : 갤러리 스페이스 수퍼노말(서울 성북구 선잠로 5길 69 / 길상사 앞)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재명표 부동산 공급대책, 이번엔 '도심·속도·실행'을 걸었다
- 인공지능 로봇이 준 충격... 남의 일이 아닙니다
- 쫓겨난 한동훈, 지지층에 "절대 포기 말라, 반드시 돌아온다"
- '출근길 시위' 전차교통방해 첫 유죄, 전장연 "김건희엔 솜방망이더니"
- 기안 84가 알려주는 이사통 '김선호'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 '닭 목 비틀어도 새벽 온다'는 김영삼, 꼭 이렇게 다뤄야 했을까?
- [단독] 서울 학교운동부 학부모 31% "돈 쓰면 효과 있다"
- 내란 처벌도 좋지만... 지금 '이것' 놓치면 실패는 반복된다
- '입법 속도' 또 언급한 이 대통령 "해야 할 일 산더미처럼 많은데..."
- 신설 모든 특별시장이 과학고 설립? '일반고 황폐화' 우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