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째 방치된 동인천역사… ‘인천의 명동’ 왜 폐허가 됐을까
1990년대 인천상권의 정점
IMF·‘호프집 참사’로 침체
2017년 운영사 파산 후
공사 업체들이 유치권 행사 중

“서울 명동 못지않았죠. 거리에 까만 사람 머리가 콩나물 대가리처럼 ‘빵, 빵, 빵, 빵’ 하고 빽빽이 보였어요.”
서울로 이어진 지하철 1호선의 끄트머리, 색이 바랜 동인천역 역사가 상가 창문 밖 너머로 보였다. 두꺼운 서류 더미에 둘러싸인 공인중개업자가 한숨을 쉬었다. 머리칼이 희끗해지기 시작한 그는 이 지역에서 태어나 살아온 토박이라고 했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그 기억 때문에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 해요.”
지난 27일 찾은 인천 중구 인현동 동인천역 역사는 한산했다. 계단 끄트머리의 파란 기둥은 칠이 벗겨져 갈색 속기둥이 들여다보였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건물 뒤편에는 바닥 콘크리트 포장이 깨진 채 돌멩이처럼 굴렀다. 한때 인파가 넘쳤을 상가 입구에는 ‘유치권 행사중’이라는 현수막이 먼지투성이 유리 너머에 걸렸다. 동인천역사가 이렇게 방치된 건 2009년부터, 그러니까 올해 18년째다.

동인천역사는 1987년 설립돼 2년 뒤 문을 열었다. 설립일 기준 영등포역 다음 국내 2번째로 세워진 민자역사다. 지상 6층, 지하 3층으로 그때로선 드문 초대형 상가다. 당시 인현동 신포동 내동으로 이어지는 동인천역 인근은 명실공히 인천의 중심지였다. 대부분 시내버스가 동인천을 경유했고, ‘양키시장’으로 불리던 중앙시장과 송현시장을 비롯해 애관극장, 미림극장, 문화극장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넘쳤다.
동인천역사는 민간사업자가 상업시설을 운영하며 국가철도공단에 점용료를 내는 방식이었다. 지역상공인 9명이 설립한 동인천역사㈜가 운영주체였다. 역사 개장과 함께 자리 잡은 쇼핑센터 ‘인천백화점’은 호황을 누렸다. 1990년대 서울 상권이 포화해 인천이 새 상권으로 각광 받았고, 그 정점에 인천백화점과 동인천역사가 있었다. 덕분에 9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인들은 친구들과, 혹은 부모 손을 잡고 동인천역사와 그 인근을 들른 기억이 하나씩은 있다.
국내 도심 대부분이 그랬듯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동인천역 인근도 침체에 접어든다. 여기에 인재까지 겹쳤다. 역사가 위치한 인현동 번화가에서 1999년 벌어진 호프집 참사는 대한민국사에서 3번째로 큰 참사였다. 56명이 죽고 78명이 다친 희생자들은 기막히게도 대부분 중고등학생이었다. 이 충격으로 동인천역 일대 상권은 구월동에 새로 문을 연 신세계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인근으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이어 동인천역의 상징 인천백화점이 2001년 문을 닫는다.

인천백화점이 폐점한 자리에는 곧바로 동대문식 의류상가 ‘엔조이(N-joy) 쇼핑몰이 들어선다. 그러나 이미 죽어가는 상권이 살아나긴 역부족이었다. 불과 5~6년만에 입점한 매장이 줄줄이 빠져 사실상 고사 상태에 이르고 결국 2009년에 엔조이쇼핑몰은 공식적으로 문을 닫는다. 이로써 역사 건물에 남은 건 인천백화점이 사라진 직후 4, 5층에 들어선 화상경륜장뿐이었다.
엔조이쇼핑몰이 사라진 자리에는 롯데마트 운영사 롯데쇼핑이 들어올 채비를 한다. 그래도 동인천역은 여전히 유동인구가 있는 곳이었고, 주변 상권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운영주체인 동인천역사㈜의 여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동인천역사㈜는 2010년 리모델링 공사 계약을 했지만 1년 만에 돈이 바닥나 공사업체뿐 아니라 철도공단에도 점용료를 못 낼 지경이 된다. 역사 상가가 빈 뒤 마땅한 자금줄이 없던지라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점용료 미납이 이어지자 철도공단은 계약 만료 시 재연장 없이 종료할 것을 검토한다. 이를 알아챈 롯데마트는 2013년 입점 계획을 철회하고 발을 빼버린다. 계약만료 시한인 2017년이 되자 철도공단이 운영권을 빼앗고 동인천역사㈜는 파산했다. 돈을 못 받은 공사 하청업체들은 역사 진입을 막으며 유치권 행사를 했다. 그 결과물이 현재의 폐허가 된 동인천 역사다. 인근 카페 상인은 “그때 마트가 들어왔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이라고 했다.
동인천역 일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인천시는 2007년 주변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 고시한다. 첫 10여년간 혈세 20억원을 넘게 들여 연구용역을 했지만 결과물은 없었다. 철도공단이 건물 운영권을 가져온 2017년에도 인천시는 민간자본 2조원을 투입해 이 자리에 80층 빌딩과 5800가구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고 발표했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끝난다. 2018년 새 시장이 당선되자 인천시는 이듬해 방향을 틀어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동인천역 2030 역전프로젝트’를 제출해 선정된다. 그러나 5년 뒤 시장이 바뀌며 이 계획도 취소된다.

최근 들어 역사를 둘러싼 잡음도 끝이 보이긴 한다. 철도공단이 건물에서 버티던 유치권자들을 상대로 지난해 3월 최종 승소해서다. 관계자에 따르면 공단은 2028년 상반기 역사 지하상가 상인들의 점포계약이 끝나는대로 철거를 시작할 계획이다. 다만 당사자인 상인들은 격앙된 분위기다. 한 지하상가 상인은 “들어올 때도 수억을, 리모델링 요청 때도 개인 돈을 수백수천 들였는데 그냥 나갈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현재로서 가장 큰 변수는 국토부가 추진하는 철도 지하화 계획이다. 인천시는 지난해 5월과 9월에 국토부에 관련 제안서를 제출했다. 철도공단 관계자는 “국토부가 (인천시의) 제안서를 검토해 종합계획을 짜고 나면 그에 따라 역사 부지 개발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토부는 지난달까지 종합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감감무소식이다.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일대 상인과 주민들은 체념한 지 오래다. 민간이나 관 가릴 것 없이 워낙 번복되는 게 많았기에 어떤 발표라도 믿기 어려워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거죠.” 토박이라는 중개업자는 다시 한숨을 쉬면서도 실낱같은 기대는 놓지 않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은 없는 거 같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보단 낫지 않을까요?”
인천=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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