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 마라톤 트랙을 닮은 도서관
전국의 도서관을 여행합니다. 도서관 노동자가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도서관의 매력, 그 안에 깃든 웃음과 감동, 삶의 온기를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잇는 여행이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기자말>
[이인자 기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에세이집이 있다. 나온 지 오래 되었지만 요즘에도 인기다. 도서관 데스크에 앉아 이 책이 대출되어 나갈 때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달리기 열등생이었던 나는 언제나 100미터를 22초에 뛰었다. 그런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 100m 달리기 18초였던 친구를 이긴 적이 있었다. 늦은 밤 도서관 앞에서였다. 빈 칼집처럼 서늘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불량스러운 언니들을 만난 것이다.
"야, 거기 너희 둘!"
나와 친구는 본능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뛰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이긴 것이다. 결국 나는 친구도, 불량배 언니도 모두 따돌렸다. 그 순간 만큼은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체육 시간, 다시 그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왔다. 하지만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는 순간, 나는 다시 느린 아이가 되었다. 느린 건 달리기만이 아니었다. 집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나는 늘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에 가까웠다. 천천히 달린다고 숨이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완전히 멈춰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 그때였다. 새해 1월부터 숨이 찼다. 문득 한 도서관이 떠올랐다. 손기정문화도서관이었다.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다. 달리고 싶을 때가 아니라, 멈추고 싶을 때 나는 왜 이 도서관을 떠올렸을까.
흐릿한 답안지처럼 미세먼지가 잔뜩 낀 날, '손기정문화도서관'으로 향했다. 복잡한 서울역 지하를 지나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를 지나고, 고층아파트 사이를 지나니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보였다. 그중 한 곳이 손기정문화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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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기정문화도서관 붉은 벽돌의 외관 |
| ⓒ 이인자 |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웨이브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하늘로 향하던 곡선은 다시 가라앉는다. 벽과 문에서 끊긴 듯 보였던 서가는 가볍게 점프하듯 다른 공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마치 마법사의 주술에 이끌리듯, 이 신비한 교차점이 만들어낸 800번대, 900번대, 300번대 방들을 옮겨 다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서가를 설계했을까. 설계자의 얼굴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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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0번대 서가 꽃들의 향연 |
| ⓒ 이인자 |
손기정문화도서관은 1층과 2층이 전부였고, 규모가 큰 도서관은 아니었다. 요즘의 복합 문화 공간 형 도서관들과 달리, 이곳은 도서관의 본질인 '책'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서가에 비해 책이 유난히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꽉 찬 서가의 밀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신간 몇백 권만 들어와도 금세 자리가 모자라질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곧 밀려나야 할 책들의 운명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맨 아래 칸에 꽂힌 책들은 또 어떤가. 누군가 일부러 무릎을 꿇거나, 검색대 위에서 한 번 더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대출 되어 나갈 확률은 급격히 낮아진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의 전쟁 속에서, 한 권의 책이 기억되고 대출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다.
끝없이 달려야 했던 손기정을 기억하는 곳
손기정문화도서관이 있는 이곳은 한때 손기정 선수가 다녔던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도서관 옆에는 손기정 기념관과 손기정 체육공원이 함께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손기정 선수의 국적 정정을 위한 서명 운동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지금도 올림픽 기록에는 손기정이 아닌 '기태이 손',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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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의 서가 마라톤 서가 |
| ⓒ 이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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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와 읽은 책 다독하는 날 |
| ⓒ 이인자 |
목이 마른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카페처럼 열린 로비에는 여전히 젊은 청년들이 가득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에 몰두한 얼굴들이었다. 열람실이 따로 없는 이곳에서, 어쩌면 그 로비가 그들의 열람실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일의 자립을 위해 오늘의 쾌락을 미루고 있었고, 누군가는 더 알고 싶어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서 책과 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100미터를 15초로 달리는 사람도, 18초로 달리는 사람도, 나처럼 22초로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톤에서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각자의 속도로, 끝까지 잘 달리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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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기정 기념관 입구 달리기 |
| ⓒ 이인자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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