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 마라톤 트랙을 닮은 도서관

이인자 2026. 1. 2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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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속도로, 끝까지 달리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손기정문화도서관

전국의 도서관을 여행합니다. 도서관 노동자가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도서관의 매력, 그 안에 깃든 웃음과 감동, 삶의 온기를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잇는 여행이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기자말>

[이인자 기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에세이집이 있다. 나온 지 오래 되었지만 요즘에도 인기다. 도서관 데스크에 앉아 이 책이 대출되어 나갈 때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달리기 열등생이었던 나는 언제나 100미터를 22초에 뛰었다. 그런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 100m 달리기 18초였던 친구를 이긴 적이 있었다. 늦은 밤 도서관 앞에서였다. 빈 칼집처럼 서늘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불량스러운 언니들을 만난 것이다.

"야, 거기 너희 둘!"

나와 친구는 본능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뛰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이긴 것이다. 결국 나는 친구도, 불량배 언니도 모두 따돌렸다. 그 순간 만큼은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체육 시간, 다시 그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왔다. 하지만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는 순간, 나는 다시 느린 아이가 되었다. 느린 건 달리기만이 아니었다. 집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나는 늘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에 가까웠다. 천천히 달린다고 숨이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완전히 멈춰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 그때였다. 새해 1월부터 숨이 찼다. 문득 한 도서관이 떠올랐다. 손기정문화도서관이었다.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다. 달리고 싶을 때가 아니라, 멈추고 싶을 때 나는 왜 이 도서관을 떠올렸을까.

흐릿한 답안지처럼 미세먼지가 잔뜩 낀 날, '손기정문화도서관'으로 향했다. 복잡한 서울역 지하를 지나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를 지나고, 고층아파트 사이를 지나니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보였다. 그중 한 곳이 손기정문화도서관이었다.

마법 같은 서가가 만들어낸 공간의 리듬
▲ 손기정문화도서관 붉은 벽돌의 외관
ⓒ 이인자
문을 열었다. 1층 로비는 도서관이라기보다 카페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금방이라도 주문대 앞으로 가 아메리카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사진으로만 보던 '웨이브 서가'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유려한 곡선과 붉은 체리빛 서가가 주는 고전적임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웨이브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하늘로 향하던 곡선은 다시 가라앉는다. 벽과 문에서 끊긴 듯 보였던 서가는 가볍게 점프하듯 다른 공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마치 마법사의 주술에 이끌리듯, 이 신비한 교차점이 만들어낸 800번대, 900번대, 300번대 방들을 옮겨 다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서가를 설계했을까. 설계자의 얼굴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곳에 온 목적은 '완전한 쉼'이었기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를 정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800번대 방이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화려한 꽃과 꽃병이 놓인 이 방은 공공도서관이라기보다, 예술을 좋아하는 부잣집 안주인의 개인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처럼 느껴졌다. 도서관을 떠도는 여행자로서 포토 타임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용자들이 없는 틈을 타 인증 사진을 남기느라 바빴다.
▲ 800번대 서가 꽃들의 향연
ⓒ 이인자
다음은 900번대 서가의 방으로 갔다. 서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도심 한가운데 마련된 캠핑 공간 같았다. '잠시 멈춤'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자리였다. 서가 곳곳에는 미국 여행, 국내 여행, 유럽 여행 같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그 표식들 덕분에 이곳에서는 길을 헤맬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손기정문화도서관은 1층과 2층이 전부였고, 규모가 큰 도서관은 아니었다. 요즘의 복합 문화 공간 형 도서관들과 달리, 이곳은 도서관의 본질인 '책'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서가에 비해 책이 유난히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꽉 찬 서가의 밀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신간 몇백 권만 들어와도 금세 자리가 모자라질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곧 밀려나야 할 책들의 운명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맨 아래 칸에 꽂힌 책들은 또 어떤가. 누군가 일부러 무릎을 꿇거나, 검색대 위에서 한 번 더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대출 되어 나갈 확률은 급격히 낮아진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의 전쟁 속에서, 한 권의 책이 기억되고 대출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다.

끝없이 달려야 했던 손기정을 기억하는 곳

손기정문화도서관이 있는 이곳은 한때 손기정 선수가 다녔던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도서관 옆에는 손기정 기념관과 손기정 체육공원이 함께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손기정 선수의 국적 정정을 위한 서명 운동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지금도 올림픽 기록에는 손기정이 아닌 '기태이 손',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서가를 바라보았다. 손기정 기념관을 다녀온 뒤라서인지, 곡선으로 그려진 서가의 모습이 마라톤 트랙과도 닮아 보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그 곡선은 42.195킬로미터를 달린 마라토너 '손기정'의 시간과도 닮았었다. 국적을 빼앗긴 채 달려야 했던 청년에게 그것은 버티고 견디며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의 서가 마라톤 서가
ⓒ 이인자
이 도서관에서 나는 '다독'을 택했다. 읽고 싶은 책들을 테이블 위에 잔뜩 펼쳐 놓았다. 그날 내 마음의 온도를 가장 따뜻하게 올려준 책은<은혜씨의 포옹>이었다. 정은혜 작가가 tvN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연기한 영희의 얼굴이 겹쳤다. 읽는 내내 몸과 마음이 천천히 데워졌다. 얼마 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병률 시인의 <좋아서 그래>도 읽었다. 여행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천천히 음미하면서 배워보고도 싶었다. 시인의 젊었던 시절의 감각도 좋았지만, 중년이 되어 더 깊어진 감각도 참 좋구나 싶었다.
정수기의 물을 마시려 했는데 종이컵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문을 보니 일회용 종이컵을 비치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말로만 환경 보호를 이야기해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도서관 여행자의 기본인 텀블러를 챙겨오지 않은 건, 내 부주의였다(친구는 텀블러를 가져왔다).
▲ 친구와 읽은 책 다독하는 날
ⓒ 이인자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멈춰 선다

목이 마른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카페처럼 열린 로비에는 여전히 젊은 청년들이 가득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에 몰두한 얼굴들이었다. 열람실이 따로 없는 이곳에서, 어쩌면 그 로비가 그들의 열람실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일의 자립을 위해 오늘의 쾌락을 미루고 있었고, 누군가는 더 알고 싶어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서 책과 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100미터를 15초로 달리는 사람도, 18초로 달리는 사람도, 나처럼 22초로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톤에서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각자의 속도로, 끝까지 잘 달리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달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도서관 문을 나섰다. 달리는 그들과 달리, 중년의 나는 손기정문화도서관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숨이 한결 가벼웠다.
▲ 손기정 기념관 입구 달리기
ⓒ 이인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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