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뜨거운 인기 비결, 배터리 닳도록 알아본 결과

서부원 2026. 1. 2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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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에서 만난 중국] 유비가 잠들어 있는 무후사에서 느낀 것

지난 13일부터 20일까지 8일간 중국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에서 지내다 왔습니다. <기자말>

[서부원 기자]

무후사(武侯祠)는 청두를 넘어 쓰촨성을 대표하는 유적지다. 쓰촨성은 대략 1800여 년 전 촉의 땅이었고, 촉을 건국한 유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무후사다. 그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했던 명재상 제갈량도 함께 모시고 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왕과 신하를 함께 배향한 곳은 무후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쯤 와보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지>는 중국인들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필독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한때 이문열의 삼국지냐, 황석영의 삼국지냐를 두고 독자들끼리 이른바 '정사 논쟁'이 벌어진 적도 있다. 고우영과 이현세의 <만화 삼국지> 역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공교롭게도,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인 중국의 삼국 시대는 우리나라 삼국 시대와 겹친다. 차이라면, 700년 가까운 우리와 견줘 왕조의 명멸이 잦았던 중국의 경우는 고작 한 세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천 년도 더 지난 명대 나관중에 의해 소설로 각색되었을지언정 100년의 전란 속 영웅들의 일대기를 담은 불세출의 역작이다.

<삼국지>의 공간적 배경은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이 가로지르는 곳이다. 역사 속 이야기를 따라 답사할라치면 한두 해 정도로는 어림없을 만큼 광활한 땅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촉의 땅, 쓰촨성에 있는 관련 유적만 둘러보는 데만 1년으론 부족하다고 말한다. 참고로, 쓰촨성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다섯 배가 넘는다.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 전경. 무후사의 맨 뒤에 자리한 실제적인 중심 건물이다. 입구 문엔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명성이 온 우주에 드리웠다는 의미다. 제갈량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를 보여준다.
ⓒ 서부원
<삼국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여행지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와 교훈을 얻는 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다. <삼국지>를 읽고, 또 아이들에게 읽히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삼국지>를 주제로 한 중국 여행 상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없는 현실에서, <삼국지>의 첫 번째 여행지는 촉의 도읍지였던 청두의 한복판에 자리한 무후사가 맞춤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무후사의 곳곳을 꼼꼼하게 답사한다면 <삼국지>를 통독한 것과 같은 지혜와 교훈을 얻어갈 수 있다. 넓기도 하려니와, 건물과 인물상 앞에 소개된 중국어 안내판을 하나하나 번역해 읽어가다 보면 하루 해가 짧다. <삼국지>의 서사와 등장인물을 나름 자세히 기억하는 여행자라면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다.

한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후사 건물마다 내걸린 현판과 주련의 글귀를 읽고 해석해 보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조금 번거로울 뿐 어려울 건 없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독음과 의미는 물론, 유래와 고사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관람 시간에 쫓겨 사진 찍기에 바쁜 단체 여행객에게는 사치스러운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현지의 물가를 고려할 때, 무후사의 입장료는 정말 비싸다. 우리 돈으로 1만 원이 조금 넘는다. 청두를 대표하는 음식인 마파두부와 탄탄면이 고급 식당에서도 5천 원을 넘지 않고, 숙소에서 무후사까지 타고 간 호출 택시비도 2천 원 남짓이었다. 하긴 무후사 뿐만 아니라, 중국의 유적지 입장료는 어디든 비쌌다. 비싼 만큼 오랫동안 많이 봐야 '남는 장사'다.

무후사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유비와 제갈량을 모신 일직선의 사당 영역과 유비의 묘인 혜릉 영역, 그리고 도심 속 공원처럼 가꿔진 부속 정원 영역을 순서대로 관람하는 동선이다. 담장 너머엔 기념품과 주전부리 등을 파는 상업 지구인 '진리 꾸지에(錦里 古街)'가 무후사를 감싸고 있다. 과거 비단을 짜던 장인과 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후사의 정문엔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의 소열제, 곧 유비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곳의 공식 명칭도 아닐 뿐더러 택시 기사에게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후사는 한소열묘 안에 자리한 제갈량의 사당이다. '무후'는 제갈량이 받은 작호로, 섬서성 한중(漢中)에 위치한 제갈량의 묘소도 '무후묘'로 표기된다.

왕보다 신하를 앞세운 작명은 사당의 배치에서도 확인된다. 수문장처럼 세워진 비석을 지나면 곧장 유비의 사당인 '유비전'이다. 사당의 좌우 회랑에는 그를 도와 천하통일을 도모했던 부하들의 인물상이 호위하듯 세워져 있다. 관우와 장비는 물론, '조자룡'으로 더 유명한 조운과 '노익장'의 어원이 된 황충, 촉 최후의 무장으로 알려진 강유 등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무후사의 '조연' 유비(왼쪽)와 손자인 유심의 인물상(오른쪽 감실 안)이 보인다. 정작 2대 황제 유선의 인물상은 없다.
ⓒ 서부원
비유컨대, 유비전은 절로 치면 대웅전이요, 궁궐로 치면 법궁이지만, 너무 이른 등장에 누구든 당황하게 된다. 유비전은 무후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곳까지는 정문에 달린 편액대로 한소열묘다. 유비전을 통과해 뒤로 나오면 비로소 무후사 건물이 보이고, 여기서부터 유비는 '조연'이다.
'출사표'를 새겨놓은 비문과 함께 무후사의 주인공인 제갈량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를 추앙하는 온갖 글귀를 적은 주련이 건물을 도배하듯 빼곡히 내걸려 있다. 새 깃털로 만든 부채인 '백우선(白羽扇)'을 손에 든 제갈량의 인물상 앞에는 꽃다발이 여러 개 놓여 있고, 엎드려 절하는 이들이 줄을 섰다. 유비 앞에선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제갈량을 배향한 무후사를 뒤돌아 나와 유비의 묘소인 혜릉으로 가는 길목에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석상을 자연석에 새겨놓았다. 왼쪽부터 장비와 유비, 관우다. 흥미로운 건, 세 인물을 상징하는 색깔의 돌에 그대로 새겼다는 점이다.
ⓒ 서부원
하늘을 찌르는 제갈량의 인기

사당의 가장 높은 곳이나 맨 뒤에 배향 하려는 중심 인물을 모시는 게 보통일진대, 무후사의 주인공은 제갈량이라는 뜻이 된다. 듣자니, 중국인들은 유비가 아닌 제갈량을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고 한다.

제갈량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 보니 무후사 뒤에 조성해 놓은 '도원결의 석상'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제갈량만 알현하고 곧장 뒤돌아 나가는 이들도 더러 보인다. 줄 서서 사진을 찍던 제갈량 인물상 앞 북적이는 모습과는 달리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 주변은 고요하리 만큼 한산했다. 언덕인지 무덤인지 분간하기 힘든 크기 탓에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유비보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제갈량을 더 흠모하는 이유가 뭘까?'
 백우선을 손에 든 제갈량 앞에는 꽃다발이 여러 개 놓여 있다. 향을 봉헌하려는 이들도 줄을 선다. 유비의 인물상 앞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 서부원
무후사를 거닐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고, 답을 찾기 위해 그곳에서 고스란히 한나절을 보냈다. 안내판을 번역해 읽고 삼국지 속 인물의 생애를 일일이 검색하느라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금세 닳았다. 답은 사당에 모셔진 인물상에 있었다. 대충 보면 파악하기 힘든 것이어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는 생각에 괜히 우쭐해졌다.

유비전엔 유비와 그의 손자인 유심의 인물상 둘 뿐인데, 제갈량 옆엔 그의 아들인 제갈첨과 손자인 제갈상 등 3대의 인물상이 나란하다. 유비의 아들이자 촉의 제2대 황제인 유선의 인물상이 빠져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유선은 환관 세력에 휘둘려 위 나라에 항복한 용렬한 군주였다. 아들인 유심은 아버지의 항복을 비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하고 병사한 뒤 아들과 손자는 충신의 후예답게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촉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했다. 위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제갈첨이 중과부적으로 죽자, 함께 참전한 아들 제갈상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적진으로 돌격하다 전사했다. 당시 제갈상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상의 인물상. 전사할 당시 나이가 열여덟 살로, 그때의 앳된 모습을 형상화한 듯하다. 죽어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제갈량과 제갈첨을 지키겠다는 듯 듬직하고 다부진 모습이다.
ⓒ 서부원
<삼국지>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중국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꽌시(關係)'의 핵심은 유구한 역사 속 올돌한 대의명분의 가치, 곧 '의리'다. 그들에겐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며 일신의 안위를 도모한 유선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전장에 나간 제갈량의 충성심과 자손들의 의로운 죽음이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원결의를 맺은 세 사람 중에 맏형인 유비보다 관우가 더 사랑 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포로로 잡힌 뒤 적장 조조로부터 적토마까지 선물 받는 등 극진한 예우와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유비와의 약속을 지킨 그의 의리에 감동하는 것이다. 관우는 이후 군신으로 추앙되며, 그를 배향하는 사당이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여럿 있다.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관우는 중국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군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역사 박물관이든 관우상은 약방의 감초처럼 전시되어 있다.
ⓒ 서부원
공교롭게도, 의리를 팽개친 유선과 의리를 지킨 관우는 둘 다 조조가 천하를 호령하던 위나라의 도읍 뤄양(洛陽)에 묻혔다. 다른 게 있다면, 유선의 묘는 존재조차 희미하지만, 관우의 묘는 '관림(關林)'으로 불리며 성역화되었다는 점이다. 조조가 손권으로부터 관우의 수급을 건네받은 뒤 삼가 절을 올렸다는 자리다. 참고로, 묘(墓)나 릉(陵) 대신 '림(林)'을 붙여 존숭하는 인물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관우와 공자, 둘 뿐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자식 농사'에 실패하여 무후사의 아랫목을 빼앗긴 유비의 인물상 앞에서 새삼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비록 신하인 제갈량에게 밀려났을지언정 당신도 위대한 삼국지의 영웅이라며 고개를 숙인 것이다. 한나절을 보낸 무후사의 문을 나서면서 학창 시절 읽고 또 읽었던 <삼국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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