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영화 한 장면 아닙니다…금오산 절벽에 매달린 '공중 사찰'

백종현 2026. 1. 28. 05: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금오산 약사암. 금오산 정상 바로 아래 벼랑에 자리한 도량이다. 암자 너머로 낙동강과 구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종현 기자

시작은 사진 한 장이었다. 구름 위에 걸친 듯 벼랑 위에 매달린 절집 하나.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도심과 낙동강이 한 프레임에 담긴 풍경. 경북 구미 금오산(976m) 정상에 자리한 약사암의 모습이다. 금오산은 경북 땅에서도 영험하기로 소문난 장소다. 1월이 가기 전 새해 소원이라도 빌어볼 참으로 배낭을 멨다.


겨울 산은 고난의 연속


거대한 얼음 기둥이 된 금오산 대혜폭포. 혹한의 추위 앞에서 28m 높이 폭포가 꽝꽝 얼어붙었다. 백종현 기자
“산이 험하고 추우니 봄에 오시지요.”

취재 문의에 약사암 주지 묵연 스님의 말은 단호했다. “하룻밤만 재워 주십시오. 절벽의 암자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 하나만 담아가겠습니다.”

침묵 뒤 수화기 너머로 답이 돌아왔다. “그러시지요. 저도 그 풍경에 반해 이 절에 눌러앉았습니다.” 곧장 금오산으로 향했다.

겨울 산행은 늘 변수가 따른다. 아뿔싸, 산 중턱 해운사까지 오르내리던 케이블카가 전기 공사로 멈춰 있었다. 케이블카가 없어도 20분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체감은 전혀 달랐다. 출발부터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해운사를 지나 계곡에 들자 대혜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지를 울린다’는 소문과 달리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폭포 전체가 강추위에 꽝꽝 얼어 있었다. 높이 28m의 거대한 고드름 앞에서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맸다.

금오산 도선굴.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가 득도한 장소로 유명하다. 백종현 기자

구미 사람들은 금오산에 영험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먼 옛날 의상대사가 수행했고, 산자락 상모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혜폭포 옆은 아찔한 벼랑길이다. 폭 1m 남짓한 잔도를 지나자,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가 득도했다는 도선굴이 나왔다. 도선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액자였다. 안에서 밖을 보자 절벽 아래 풍경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절벽 위의 밤


금오산 현월봉. 정상석 너머로 구미 산업단지가 보인다. 현월봉 아래의 벼랑 한편에 약사암이 있다. 백종현 기자
금오산 등반은 만만치 않았다. 산 전체가 바위로 이뤄진 암산이어서다. ‘사진 찍기 좋은 곳’ 따위의 안내판보다 ‘추락 위험’ ‘낙석 주의’ ‘상습 결빙 구간’ 같은 시뻘건 경고문이 수시로 나타났다. 평탄한 흙길 하나 없이 돌부리 가득한 비탈과 계단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576개의 나무계단을 올라서야 하는 ‘할딱고개’. 입안에서 쇠 맛이 느껴질 만큼 숨이 찼다.

정상 현월봉에 섰다. 구미 시내와 산업단지, 낙동강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였다. 현월봉 바로 아래,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한 약사암은 도무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구름 위에 가부좌 튼 신선 같기도 하고, 무협 영화 속 소림사 같기도 했다.

약사암은 스님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머무는 작은 도량이다. 수도관 동파로 물마저 끊겼지만, 몸을 누일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간단히 예불을 올리고 작은 요사채에 짐을 풀었다. 생수 한 병에 의지해 덜 마시고 덜 씻으며 하룻밤을 버텼다.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완전한 적막이죠. 수행자에겐 이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묵연 스님의 말대로 해가 지자 끝없는 고요가 찾아왔다. 암자가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했다.

금오산 약사암 종각의 일출. 낙동강 너머로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이 위에서, 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백종현 기자


여명의 시간. 내심 운해와 설경이 어우러진 근사한 풍경을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맑은 하늘을 가르고 떠오르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봤다. 영하 16도의 날씨였지만, 포근한 기운마저 돌았다. 아침 공양으로 떡국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하산했다. 추위도 시름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여행정보

탐방안내소에서 금오산 정상까지는 대략 3.3㎞ 거리로, 2시간가량 걸린다. 백종현 기자

금오산은 겨울철 주등산로만 입산을 허용한다. 탐방안내소~해운사~대혜폭포~할딱고개 등을 거치는 3.3㎞ 코스로, 대략 2시간이 걸린다. 돌부리가 많고 경사가 험해 등산로와 스틱이 필수다. 눈이 내린 뒤라면 아이젠도 챙겨야 한다. 탐방안내소에서 스틱과 아이젠을 무료로 빌려준다. 금오산 케이블카(어른 1만1000원)는 31일부터 정상 운행한다.

구미=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