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세 번의 경고장… 정부·국회 묵살했다 [view]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원복(원상복귀)’은 이유 없는 급발진이 아니었다. 미국 빅 테크 기업에 대한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한국의 입법에 대한 공개적 우려 표명,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공식 서한 발송에 이어 JD 밴스 미 부통령이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했지만, 한국 정부와 국회는 심각한 징후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결국 트럼프가 전가의 보도라고 믿는 관세 카드를 꺼내든 배경이다.
트럼프는 26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한국 국회가 우리의 역사적인 무역 협정을 입법화하지 않았다”며 한국산 자동차·목재·의약품 품목관세와 상호관세를 기존 15%에서 25%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한·미 정상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를 통해 합의한 관세 인하(25%→15%) 조치를 두 달 반만에 뒤집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트럼프는 입법부(legislature)만 세 번 거론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 입법부가 미국과의 거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면서다. 또 이재명 대통령과 두 차례의 회담에 걸친 합의라는 점을 강조하며 “왜 한국 국회는 아직도 이를 승인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대미 투자의 법적 근거가 되는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대미투자특별법)’ 처리를 문제 삼은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한국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하는 조건으로 특별법이 한국 국회에 제출되면 그달 1일자로 소급해 관세를 인하하기로 했다. 미국은 지난해 11월 26일 특별법이 발의된 뒤 실제 관세를 11월 1일자로 소급 인하했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회부된 뒤 2개월째 안건 상정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12월 조세 심의와 이혜훈 전 장관 후보자의 1월 인사청문회로 개별 법안 심의를 할 여유가 없었다”(27일 정태호 재경위 간사)는 입장이지만, 그간 정부여당에서 ‘속도 조절’ 기류도 감지됐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2일 블룸버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투자 자금이 올해 상반기 안에 집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은 이제야 부랴부랴 입법 절차를 서두르고 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대미투자특별법은 잘 심의하면 문제 없이 1분기 안에 충분히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간이 공청회’까지 거론하면서다. 다만 이는 바꿔 말하면 트럼프가 관세 폭탄을 때리기 전에도 입법이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미국은 우리가 핵추진 잠수함 도입 등 미국의 후속조치 이행만 촉구하고 정작 우리의 의무는 방기한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두 달째 발의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보니 오해를 산 것 같다”고 했다.

물론 팩트시트에는 법안 발의만 명시돼 있는데, 트럼프가 처리를 문제삼은 것이라면 아예 골대를 옮기겠다는 억지를 부리는 게 된다. 다만 더 큰 문제는 트럼프가 한국을 저격한 배경은 대미투자특별법만 염두에 둔 게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관계부처에 따르면 제임스 헬러 주한 미국 대사대리는 지난 13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제1수신자로 한 서한을 발송했다. 수신 참고인에는 조현 외교부 장관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포함됐다.
청와대는 이날 해당 서한에 대해 “미국 측이 과기부 장관 등에게 보낸 서한은 디지털 이슈 관련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양국은 팩트시트에서 “망 사용료,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 있어서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고 합의했는데, 한국 측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미국은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과 온라인 플랫폼 법에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명해왔다. 미 국무부는 지난달 31일 “한국 정부가 미국 온라인 플랫폼의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네트워크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승인한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와 국회가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다루는 과정에 대한 미국의 불신도 관세 재부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미 측 서한의 수신자인 배 부총리는 쿠팡 관련 범부처 태스크포스(TF)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쿠팡 연석 청문회 현장에는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도 방청객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밴스 부통령도 지난 23일 김민석 총리를 만나 “미국 기업인 쿠팡이 한국의 다른 시스템 하에서 갖는 다른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밴스 부통령은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담임목사의 사건도 거론했다고 김 총리는 전했다. “(밴스 부통령이)미국 내 일각의 우려가 있다고 이야기해 한국은 미국에 비해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된 상황에서 선거법 위반에 대한 조사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는 것이다.(24일 특파원 간담회) 다만 밴스 부통령이 이를 쉽사리 납득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민주당은 당초 이날 예정됐던 ‘쿠팡 바로잡기 TF’ 출범을 다음달 2일로 미뤘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 장례 일정을 고려했다는 게 공식 입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쿠팡 때리기’의 반작용이란 분석을 의식한 것일 수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 측의 서한과 밴스 부통령이 김 총리에게 팩트시트 합의 이행을 강조한 것은 모두 사전 경고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은 팩트시트를 ‘국제법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니라고 보고 후속 조치가 더뎠는데, 결국 문제가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경고음이 여러 차례 울렸는데도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이날 “미국 측의 서한은 디지털 이슈와 관련해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라며 “한국 국회가 한·미 간 무역합의 이행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트럼프의)언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다양한 현안에 대해 미국의 복합적 불신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는데도 여전히 사안을 분리해 선을 긋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유럽연합(EU)이 트럼프의 그린란드 병합 시도에 반발해 대미 투자 법안 처리를 미루자 트럼프가 한국을 상대로 실력 발휘에 나서면서 본보기로 삼은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날은 당초 EU 입법기관인 유럽의회가 관세 인하의 조건으로 약속한 대미 투자액 6000억 달러(약 868조원)와 관련한 법안을 처리하기로 했던 날이다.
이달 들어 이민단속 요원들의 총격으로 미국인 2명이 사망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하는 등 트럼프가 국내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부정적 여론을 돌파하기 위해선 가시적인 경제 성과를 제시해야 하는데, 한국의 조속한 대미투자 ‘성적표’가 필요하다는 해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 “한국, 일본과 (무역) 합의를 타결하면서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금을 확보했다”며 한국 정부의 입장과 무관하게 해당 투자금이 알래스카 천연가스 사업에 투입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윤지원·안효성·한영익·강광우·윤성민 기자,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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