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편의점 외국인 알바생의 수모... 오죽하면 이런 신조어가
일본 생활 18년 차인 두 아이의 엄마가 프리랜서 노동자로 살면서 경험한 일본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합니다. <기자말>
[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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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도쿄의 한 편의점에서 고객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자료사진. |
| ⓒ EPA 연합뉴스 |
카운터로 돌아온 점원은 굳은 얼굴로 딸이 내민 과자를 봉투에 담았다. 나는 "감사합니다. 수고가 많아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살짝 풀어지는 그녀의 얼굴 위로 오래전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18년 전, 교환학생으로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나 역시 편의점에서 일했다. 외국인에게도 문턱이 낮았던 편의점은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한 편의점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인사말부터 젓가락을 건네는 방법, 봉투를 접는 순서까지 모든 것이 꼼꼼히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했다. 미숙한 일본어로 인사를 건넬 때마다 손님들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이름표로 향하곤 했다.
한 번은 거스름돈을 잘못 건네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일본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라는 손님의 말을 되받아치려는 순간, 내 앞을 가로막고 대신 고개를 숙인 것은 늘 과묵하던 일본인 점장이었다.
손님이 돌아간 뒤 점장은 나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 저 사람은 일본어밖에 못하지만, 너는 일본어도 한국어도 하잖아. 대단한 거야. 잘하고 있어."
1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점장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추억에 잠긴 나를 딸이 잡아당기며 "빨리 집에 가자"라고 보챘다. 편의점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유학생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하는 단어 '카스하라'
친절한 일본, 손님이 왕인 일본.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해도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로 특히 사람을 상대하는 접객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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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전철역에 걸린 갑질 방지 포스터. 원본을 이미지 번역했다. |
| ⓒ 일본철도협회 |
'카스하라'는 고객(customer)과 괴롭힘(harassment)을 합친 일본식 신조어다. 고객에 의한 괴롭힘, 소위 진상 고객의 갑질을 뜻한다. 없었던 말이 생겨났다는 것은 일본 사회 구성원들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방증이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손님은 왕", "고객 만족이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당연시돼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친절한 일본'은 손님을 떠받들기 위해 스스로를 낮춰온 일본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일본의 접객 노동자들은 소위 진상 고객들의 무리한 요구나 폭력적인 언행에도 '죄송하다'라고 90도로 고개 숙일 것을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진상 손님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고령화로 일손이 부족한 일본에서 접객 노동자들이 카스하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이직이나 퇴직을 선택하자 기업들도 사태를 방관할 수 없게 됐다.
변화는 일상에서 느낄 만큼 빠르고 구체적이다. 지난해부터 일본의 일부 주요 전철역을 중심으로 '카스하라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포스터가 걸리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면 '상식을 벗어난 언행을 하는 승객에게 하차를 요구할 수 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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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스하라 대책으로 편의점 이름표에 본명 대신 이니셜을 쓰기 시작했다. |
| ⓒ 닛테레 뉴스 |
지자체도 움직이고 있다. 도쿄도는 2025년 4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카스하라 방지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는 "누구도, 어떤 장소에서도 카스하라를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문구가 담겼다. 고객의 갑질이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첫 사례다.
일본 정부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지난해 12월 후생노동성은 '카스하라 방지'를 포함한 노동정책추진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기업은 진상 고객에 대해 녹음·녹화, 출입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고, 고객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할 경우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개정안은 오는 10월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이제야 일본 사회가 접객 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한국에 돌아와 콜센터를 이용하다 보면 "지금 통화 중인 상담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자 아들입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듣게 된다. 그 짧은 문장을 들을 때면 '아, 한국에 왔구나' 하고 실감하곤 한다.
한국 역시 접객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인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상기시킨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보다 한발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본에서도 언젠가 '손님은 왕'이라는 말 대신, '노동자 역시 감정을 가진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한국인 관광객들이 칭찬하던 '친절한 나라 일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고객의 부당한 요구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노동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 변화는 일본에 있는 누군가의 딸과 아들이,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테니 너무 불편해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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