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로봇이 키운 전고체 '기대감'…배터리 3사, 전기차 밖에서 승부
로봇·ESS 신수요 확대 시 '라인 운영+제품 조합'이 경쟁력

[디지털데일리 배태용기자] 피지컬 AI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배터리 업계의 시선도 다시 바뀌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숨 고르기에 들어간 사이 휴머노이드 로봇과 서비스 로봇이 '새 수요'로 떠오르자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가 다시 전면으로 올라오는 분위기다. 전고체는 전기차 대중화보다 로봇 같은 고부가 응용처에서 먼저 의미 있는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전시회와 산업 현장에서는 휴머노이드 시연이 단순 콘셉트를 넘어 실제 운용을 전제로 한 경쟁으로 번지고 있다. 로봇 팔과 이동형 플랫폼을 묶어 공장 자동화에 연결하는 데모가 늘었고 물류·보안·리테일 영역에서도 상용화 속도를 끌어올리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로봇이 실험 단계를 지나 생산과 서비스 현장으로 들어갈수록 핵심 과제는 성능 자체보다 '가동률'로 수렴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로봇이 사람처럼 오래 움직여야 수익 모델이 성립하는데 결국 그 시간을 좌우하는 건 배터리다. 충전 시간이 길어지거나 잦은 배터리 교체가 필요해지면 로봇 도입 명분인 운영비 절감이 흔들린다. 설비가 멈추는 시간이 곧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봇이 전기차처럼 배터리를 크게 탑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휴머노이드는 내부 공간이 제한돼 있고 방진·방수 요구까지 겹치면서 열이 쌓이기 쉽다. 급속 충전으로 유휴 시간을 줄이려 해도 발열이 커지면 내부 부품 수명과 안정성에 부담이 된다. 결국 '오래 움직이되 안전하고 열을 견디는 배터리'가 필요해지고 이 지점에서 전고체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 대신 고체 전해질을 적용해 안정성과 공간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꼽힌다. 화재 위험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 여지가 생기고 같은 공간에서 더 높은 성능을 내는 구조를 목표로 한다. 특히 휴머노이드는 산업 현장에서 물리 충격과 반복 구동을 버텨야 한다. 단순히 '전력'이 아니라 '내구성'과 '안전성'이 같이 필요한 제품인 만큼 전고체의 가치가 전기차보다 먼저 부각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터리 업계에선 전고체가 전기차 주력 시장에서 본격 확산되기 전 로봇·드론·도심항공 같은 고부가 분야에서 먼저 채택될 가능성에도 무게를 둔다. 차량은 보급형 시장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가격 민감도가 크지만 로봇은 전체 시스템 가격에서 배터리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멈추지 않고 돈을 버는 시간'의 가치가 더 클 수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로봇은 배터리 비용 자체보다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해지는 제품"이라며 "초기 시장은 비싸더라도 성능이 입증된 배터리를 먼저 쓰는 흐름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배터리 3사도 이런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 시점을 2027년으로 제시하며 기술·공정 검증 속도를 끌어올리는 흐름이다. 전기차 대중화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휴머노이드처럼 안전·발열·공간 제약이 동시에 걸리는 영역에선 전고체의 강점이 먼저 부각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전고체 연구개발과 별개로 배터리 설계, 열관리, 안전 설계 등 시스템 통합 역량을 축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전고체의 상용화 난도가 높다는 현실론도 존재하는 만큼 로봇 시장이 커질수록 셀 성능뿐 아니라 팩 설계와 관리 시스템까지 묶어 공급하는 역량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로봇은 좁은 공간에 배터리를 넣고도 충격과 발열을 버텨야 하는 만큼 안전성과 효율을 동시에 맞추는 제품 설계가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SK온 역시 차세대 배터리 기술 투자를 이어가며 이후 응용처 변화에 대응하는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흐름이다. 전고체 로드맵을 포함해 차세대 기술군을 꾸준히 키우겠다는 기조가 잡히는 만큼 로봇·ESS 같은 신규 수요가 실제로 열릴 때 어떤 형태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배치할지가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중국 기업들의 움직임도 변수다. 중국은 리튬인산철(LFP) 기반 대량 공급망에서 강점을 보여왔지만 휴머노이드가 요구하는 고에너지·고안정성·공간 효율은 단순 가격 경쟁만으로 풀기 어렵다. 대신 중국에선 '전고체'로 가는 과도기 기술로 젤(반고체) 전해질을 적용한 '준전고체(세미 솔리드)' 배터리가 먼저 상용화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중국 상하이자동차(SAIC)는 칭타오(QingTao) 에너지의 준전고체 배터리를 적용한 양산차 출시 계획을 공개한 바 있다. 다만 완전한 의미의 전고체가 '대량 양산' 단계로 넘어가려면 소재·수율·원가 같은 벽이 남아 있어 기술과 공급망 선점 경쟁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기차 수요 둔화가 길어질수록 배터리 기업들은 '물량'보다 '수익성'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로봇과 ESS 같은 신규 수요가 커질 경우 생산 라인 운영과 제품군 조합이 경쟁력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업계에선 전고체가 전기차 대중화의 상징이 되기 전 로봇이라는 고부가 시장에서 먼저 존재감을 키우며 판을 흔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휴머노이드가 늘어나면 배터리는 단순 소모품이 아니라 로봇의 '가동률을 파는 핵심 부품'이 된다"며 "전고체는 가격보다 성능과 안전으로 먼저 선택받을 가능성이 커 초기 시장에서 레퍼런스를 누가 쌓느냐가 다음 사이클의 주도권을 가를 수 있다"고 말했다.
Copyright © 디지털데일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