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곤 칼럼] 이혜훈 낙마가 남긴 것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낙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사회 지도층의 품격·도덕성 문제다. 이 후보자가 머리 좋고 뒷배경이 든든해 그 자리까지 올랐는지 모르겠으나 드러난 의혹만 놓고 보면 바르게 살지 않았다. 공인의 윤리 의식이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국회의원을 세 차례나 하고, 서울 동대문구와 중·성동구, 충청북도를 옮겨다니며 끝없이 권력을 탐하는 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든다. 급기야 진보 진영까지 넘나들었다가 탈이 난 것이다. 진작 걸러내지 못한 걸 보면 우리 사회 시스템에 큰 구멍이 있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치부가 드러날 우려가 있는데도 장관 자리를 받은 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정치판에서 다져진 강심장 덕분인지, 아니면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
「 진보·보수 막론 기득권층 부패 심각
걸러내지 못한 사회 시스템에 구멍
그들에게 늘 속고 당하는 건 국민
국민 납득 못하면 탕평 인사는 실패
」
어디 이 후보자뿐이겠는가. 최근 논란이 된 권성동·김병기·강선우·전재수 의원은 물론 역대 정부에서 문제가 된 인사들이 오십보백보다. 용케 비리를 숨긴 채 지금도 권력을 만끽하는 지도층 또한 많을 것이다. 수년 전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 비리가 쏟아질 때 진보 진영의 항변은 이랬다. “탈탈 털면 그 정도 안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자기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회에서 용인하는 법적·도덕적 기준을 한참 낮춰 놓았다. 그것도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자처하는 진보 사람들이.
진보·보수 막론하고 기득권층 곳곳에 부패가 만연했다. 뇌물,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자녀 입시비리, 논문 표절, 그리고 갑질·거짓말…. 낯 뜨거운 일을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다. 외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큰소리친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희망 회로를 돌리며 끝까지 버틴다. 설령 낙마해도 시간이 흘러 잊을 만하면 슬그머니 다시 나와 이 자리 저 자리를 기웃거린다. ‘국민만 바라본다’는 그들의 허울 좋은 말에 언제나 속고 당하는 건 다름 아닌 국민이다.
국민의힘은 이 후보자를 배신자라고 공세 수위를 높였지만,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다. 그는 직전까지 국민의힘 서울 중·성동구 당협위원장이었다. 보수 정당에서 그 좋다는 서울 서초갑 지역구 세 차례를 포함해 다섯 번이나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다. 보수가 키워놓고 이제 와서 돌을 던지는 게 맞나 싶다. 흥분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봐야 한다. 더 우려스러운 건 정부의 검증 실력이다. 이 후보자 세평은 정치권에선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고 한다. 기자들이 어렵지 않게 수많은 의혹을 취재할 수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후보자가) 보좌진에게 갑질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다. 정부만 몰랐다는 건가. 어설픈 인사로 탕평의 좋은 취지가 퇴색했다.
탕평 인사는 한쪽 편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다. 말이 쉽지, 역대 정부에서 마음을 열고 널리 인재를 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흔히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공 사례로 들지만, 엄밀히 말하면 탕평 인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공동 정권으로 집권한 만큼 자리를 나눈 것이다. 그 뒤의 대통령도 탕평 인사에 인색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맡기겠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자기 진영만 바라보며 단절과 불통의 정치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검사 사랑, 충암고·서울대 법대 사랑은 거론할 가치도 없다.
이재명 정부 8개월간 주요 공공기관장에 대통령의 사법시험·사법연수원 동기가 9명째 등용됐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조원철 법제처장, 차지훈 주유엔 대사, 김성식 예금보험공사사장은 이 대통령의 형사사건 변호인을 맡은 경력이 있다. 전문성을 요하는 금감원장에 후배 검사를 앉힌 윤석열 정부 때와 뭐가 다른가.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를 하면서 가물에 콩 나듯 탕평 인사를 해봐야 소용없다. 이혜훈 카드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정부가 홍보 이벤트를 한다’는 느낌을 준 이유다. 더 큰 현안을 덮으려거나 보수의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이번 인사를 한 거 아니냐는 저질 유튜버 수준의 음모론이 판친 이유이기도 한다.
정부는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이번 인사에 반발이 심하고 억측이 쏟아지자 섭섭했던 것 같다. 이달 중순만 해도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보수 쪽 인사를 안 쓴다고 비판하더니 이제 쓰니까 10년 전 문제를 꺼내온다. 이 후보자는 검증해보니 훌륭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렵게 모셔왔는데 이런 식이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큰마음 먹고 탕평 인사를 했더니 ‘이래도 반대, 저래도 반대’하면 어쩌란 말이냐는 불만이다. 그래서 10년 지난 일 정도는 덮어주자는 건가. 어렵게 모셨으니 이해해 달라는 건가. 상대 진영 인사를 발탁한다고 무조건 탕평이 성공하는 게 아니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 입장에선, 딴 세상에서 살아온 장관 후보자의 구질구질한 의혹을 접하는 건 짜증나고 피곤한 일이다. 정부는 미안한 마음부터 가져야 한다.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면 탕평 인사는 실패한다.
고현곤 주필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후 8시, 엄마는 가계부 썼다…축구부 아들 서울대 보낸 비법 | 중앙일보
- "70대 근육맨 되자 돈도 번다" 돌쇠 공무원 은퇴 후 생긴 일 | 중앙일보
- "유승민 이름만 나오면 쌍욕"…이준석 경악시킨 윤 한마디 | 중앙일보
- 돌림판 돌려 성적 행위…미성년자 성착취 충격 생중계, 무슨 일 | 중앙일보
- 여성기사 앞에서 옷 벗고 음란행위…택시서 벌어진 충격 장면 | 중앙일보
- 온몸 부러진 채 숨진 90대 노모…"딸은 때리고 사위는 혈흔 지웠다" | 중앙일보
- [단독] '강선우 1억' 뼈아픈 與, 서울 공관위서 현역의원 뺀다 | 중앙일보
- 女화장실 몰카범 잡고보니…가발 쓴 20대男 공무원 '충격' | 중앙일보
- 1만원 거리를 "눈 와서 5만원"…한국 망신 시키는 '바가지 택시' | 중앙일보
- '탈세 의혹' 차은우 "도피성 입대 아니다…진심으로 사과"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