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유머로 현대미술과 접선하는 ‘조선의 팝아트’ [문소영 논설위원이 간다]
K아트·디자인의 미래 꿈꾸는 민화

“민화는 집을 장식하던 ‘생활 속 그림’이고 유머가 있습니다. ‘뮷즈’가 지향하는 방향과도 잘 맞습니다.”(정용석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사장)

지난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일으킨 ‘까치호랑이(사진)’ 열풍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조선 후기의 대중 그림, 즉 ‘조선 팝아트’인 민화의 재조명은 이미 10년 넘게 빌드업되고 있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미술관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문자도·책거리’, 2018년 갤러리현대 ‘민화, 현대를 만나다: 조선시대 꽃그림’ 등은 민화를 ‘아마추어 민중 화가의 소박한 그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끌어내며, 참신한 조형·색감, 즉흥성, 유머라는 현대적 면모를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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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모 전 경주대 교수
현대 민화 작가 20~30만명 추산
‘토착’ 중시하는 요즘 흐름 부합
정용석 국박 문화재단 사장
K아트 소재 뮷즈 국내외 인기
민화 모티프 뮷즈도 개발해야
」
단색화 이후 K아트 다음 타자는
‘문자도·책거리’ 전시를 공동기획했던 갤러리현대는 그 10주년을 맞아 지금 본관에서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를 열고 있다. 또 민화적 원형을 품은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화이도’도 신관에서 개막했다. 단색화 이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K아트의 다음 타자를 민화 및 그 후계자에서 찾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지난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민화전’과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의 ‘알고 보면 반할 세계: 민화와 K팝아트 특별전’ 등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특히 후자의 전시는 민화 모티프의 단순 재현보다 “대중적 현실의 반영, 해학과 위트, 현세의 욕망과 내세의 기원” 등 ‘민화적 태도’를 동시대 언어로 번역하는 작가들을 전면에 세웠다. 여기 참여한 김지평·박그림·이수경·임영주 등의 미술가들이 지난해 내내 여러 전시에서 활약이 많았다.
이렇게 ‘민화의 재조명’에 획을 그은 중요 전시들에 언제나 직접 기획이나 자문으로 참여한 것이 현재 한국민화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미술사학자 정병모 전 경주대 교수다. 지금 열리는 ‘장엄과 창의’ 전시 역시 공동기획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2년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의 ‘책거리’ 전시에서 설명 중인 미술사학자 정병모 전 경주대 교수. [사진 정병모]](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7/joongang/20260127002144454inbe.jpg)
Q : 어떤 계기로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A : “원래 전공은 풍속화였습니다. 풍속화는 서민의 삶을 그리지만 소비자는 왕과 사대부였죠. 그런데 민화는 풍속화와 공유하는 지점이 있으면서 소비자가 대중으로 이동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적으로 압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교 정신을 구현하는 문인화·수묵화만 중시했고 화려한 채색의 궁중화와 채색에 더해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지닌 민화를 푸대접했습니다. 20세기 대다수 미술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 문제의식으로 궁중화와 민화를 모아 2014년 『한국의 채색화』 3권 세트를 냈습니다. (지금은 추가로 발간되어 6권이다) 책을 낼 때 민화를 소장한 대기업 회장님 등에게 접촉하기 위해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님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답례로 책 세트를 드리니 박 회장님이 ‘실은 나도 처음 화랑을 할 때 현대미술보다 고미술 민화를 다루고 싶었다’면서 한 번 의기투합해서 전시를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2016년 ‘문자도·책거리’ 전시였습니다.”

Q : 이번 ‘장엄과 창의’ 전시에는 현대 작가들도 나오더군요.
A : “현대 미술가들뿐 아니라 현대 민화 작가들도 함께 보여주자고 제안했죠. 사실 현대미술계에서 민화 작가들을 살짝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걸 압니다.(여기서 ‘민화 작가들’은 현대미술을 하면서 민화를 응용하는 경우가 아니라 민화부터 공부한 작가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요즘 현대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20~30만 명이나 되다 보니까 창의적인 작품들이 굉장히 많아요. 조선 민화를 연구하다가 어느 순간, 이를 동시대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카셀 도쿠멘타, 베니스비엔날레 등에서도 서구 모던의 상징인 추상이 힘을 잃고, 지역의 삶과 이슈를 다루는 ‘토착 문화’ 바탕 예술이 부상하잖아요. 민화는 그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전통은 최소한, 변주는 마음껏
Q : 민화가 유독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A : “자유로운 상상력과 유머, 그리고 직설 대신 우화로 사회를 비트는 방식입니다. 문인화나 궁중화는 지켜야 할 격식이 있지만, 민화는 최소한의 전통만 붙잡고 마음껏 변주합니다. 이 ‘창의’는 현대미술이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기도 하죠. 그래서 민화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대중적이고, 동시대와 연결될 잠재력이 큽니다.”
![갤러리현대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 전시에 나온 조선 말기 문자도(文字圖) 부분 확대. 현대적인 세련된 색감과 전위미술을 연상시키는 대담한 조형과 구성, 유머러스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진 갤러리현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7/joongang/20260127155935224qoad.jpg)
Q : 민화 중에서도 아마추어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고퀄리티가 많습니다. 미술사학자 고연희 교수는 사실 “19세기 후반 민화의 주요 고객은 양반과 신흥 부유층이었으며, 이들이 구입한 민화는 궁중 화원들이 돈 벌기 위해 남는 시간에 몰래 그린 작품들”이었다고 했는데요. 그러니 ‘민화’와 ‘궁중화’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요.
A : "구분은 되지만, 연결고리도 매우 많습니다. 도화서 화원은 궁중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고, 그 앞이 바로 청계천 광통교였고, 광통교 일대 서포와 지화포에서 궁중 화원 그림과 민화가 함께 거래되곤 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 좋은 그림을 살 수 있었던 시장이 있었던 셈이죠. 그래서 민화가 궁중화에 영향을 주기도, 궁중화가 민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며 서로 소통했습니다."
Q : 한때 글로벌 미술시장의 K아트 대표주자였던 단색화는 문인화의 후계자라 할 수 있을 텐데, 이제 민화의 후계자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A : “정확한 문제 제기입니다. 단색화는 서구 추상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국적인 것’을 문인화 정신과 연결해 정당화해 왔죠. 이제는 단색(모노크롬)에서 채색(폴리크롬)으로, 즉 문인화의 계보만이 아니라 민화의 계보에서 동시대 언어가 더 크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정병모 교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이번에는 히트 상품 ‘까치 호랑이 배지’를 비롯해 ‘뮷즈’(뮤지엄 굿즈)로 지난해 돌풍을 일으킨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상품·공연·식음료 등 수익사업을 담당하는 이 재단은 2022년 ‘뮷즈(MU:DS)’를 박물관 상품 브랜드로 론칭했고, 2023년부터 주요 상품군에 대해 상표권 등록을 마쳤다. 매출도 급성장해 지난해 413억원으로 5년 전에 비해 6배 이상 뛰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 위치한 재단 사무실로 향하던 중 박물관 뮤지엄숍 두 곳에 들렀다. 숍 안은 꽤 붐볐다. 이 말을 전하자 정용석 재단 사장은 “오늘은 추워서 다른 때보다 적은 것”이라며 “진짜 많을 때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웃었다. 1020세대가 많더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물관이 젊어졌는데, 뮷즈가 그 역할을 많이 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또 “관람객 고령화를 걱정하던 도쿄 국립박물관이 우리 사례를 듣고 2월 말에 관계자들이 현장을 보러 오기로 했다”며 “해외와의 전시 교류도 중요하지만 유물을 자주, 오래 내보낼 수는 없는 만큼 굿즈를 통한 교류로 외국 대중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에서 뮷즈가 완판된 사례도 들었다. 정 사장은 “처음엔 그쪽 관계자들이 주저하다가 3000만원어치를 매입해 판매했는데 5일 만에 완판돼 3배 이상 추가 주문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취객 선비 변색잔 세트 인기
다음은 정 사장과의 일문일답.
Q : 지난해 많이 팔린 뮷즈 순위를 보니 유머 있는 상품이 선호 받는 것 같습니다.
A : “지난해 ‘케데헌’ 바람을 탄 ‘까치 호랑이 배지’가 1위, 그다음이 ‘취객 선비 변색잔 세트’였는데 김홍도 ‘평안감사항연도’에 나오는 술 취한 선비들의 모습 일부를 따서, 잔에 소주가 차면 얼굴이 붉게 되는 상품이었죠. 재미와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반가사유상 마음시리즈’(핑크·민트그린 등 파스텔톤의 반가사유상이 볼하트 등의 포즈를 취한 미니어처상)를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께 갖다 드렸을 때도 불경하다고 하시기는커녕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겠다’고요.”

Q : 그런 면에서 뮷즈에 영감을 주는 문화유산 중에 국보·보물 못지않게 민화도 중요할 것 같은데, 민화를 모티프로 한 뮷즈는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A : “네, 아직 큰 비중은 아닙니다. 문구류에는 책거리·책가도가 많이 쓰이고, 부채에는 화조도가 많이 쓰이며, 지난해 APEC 때 각국 정상 및 배우자에게 선물된 뷰티 디바이스 패키지에 일월오봉도가 쓰인 것처럼 궁중화는 고급 뮷즈에 쓰이곤 합니다. 다만 사례가 아주 많진 않습니다. 뮷즈는 전시와 연계돼 개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민화 전시를 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가능성이 큰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까치 호랑이 배지’도 작가가 평소 민화에 관심이 많아 그걸 바탕으로 디자인했는데, 처음엔 반응이 평범하다가 ‘케데헌’ 열풍과 함께 폭발했거든요. 당시 사실 ‘케데헌’과 직접 관련된 뮷즈가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관람객들이 열심히 찾아냈다고 할까요. 민화는 실생활과 밀접한 예술이었으니, 뮷즈로 발전하기도 더 쉽다고 봅니다.”
문소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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