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빼고 다했던 킹메이커... 이해찬이 남긴 '민주주의' 유산

임병도 2026. 1. 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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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에서 이재명까지, 4대 정권 창출의 주역... 민주당 승리 공식을 만든 '설계자'

[임병도 기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2024년 4월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더불어민주연합 합동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겸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04.11
ⓒ 유성호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의 '거목'이자 독보적인 전략가로 불렸던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지난 25일 베트남 출장 중 별세했습니다. 향년 74세입니다. 고인은 유신 시절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7선 국회의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그리고 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변곡점마다 항상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지만, 고인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수식어는 역시 '킹메이커'입니다. 그는 단순히 선거를 돕는 조력자를 넘어 민주당 정권의 골격을 설계하고 승리의 길을 닦은 '정권의 설계자'였습니다.

① '전설'의 시작 : DJ가 선택한 선거 전략의 귀재
 김대중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 휘호·어록전 개막식이 열린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민주통합당 박준영, 김두관, 손학규 대선 예비후보와 이해찬 대표가 함께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2012.08.06
ⓒ 유성호
이해찬 전 총리의 전략가적 면모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당시 고인은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사상 첫 민선 서울시장을 탄생시켰고, 이후 정무부시장으로 재임하며 행정 능력까지 증명했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눈여겨본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그를 기획본부장으로 전격 발탁했습니다. 고인은 인구 구조, 투표율, 세대별 성향 등을 정밀하게 분석해 승리의 판을 짜는 실무를 전담했습니다.

그는 여론조사를 누구보다 치밀하게 분석하면서도 결코 데이터에만 매몰되지 않는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고인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30여 년 동안 선거 여론조사를 분석하며 명심한 사실은 여론조사가 곧 여론은 아니며, 데이터에 휘둘리는 전략은 선거를 산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라는 철학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확고한 원칙이 그를 민주당의 영원한 킹메이커로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② 2002년 단일화의 승부사: 절묘한 협상으로 노무현의 승기를 잡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노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분향소로 옮기고 있다. 2009.05.24
ⓒ 유성호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더욱 각별했습니다. 1988년 13대 국회 노동위 시절부터 함께했던 두 사람은 2002년 대선에서 다시 손을 맞잡았습니다. 당시 고인은 후보 단일화 협상의 중심에서 '노무현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정체를 타개하기 위해 정몽준 의원에게 단일화를 제안했으나 협상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결국 노 후보가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하며 물꼬가 트이자, 협상단장이던 고인은 설문 문항을 놓고 치열한 심리전을 벌였습니다. 고인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정 후보 쪽은 당시 지지율이 앞서고 있어 '지지도' 방식의 설문을 가져왔어요. 저는 반대하는 척하다가 우리가 양보하는 모양새로 합의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합의 발표 직전 정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진 조사 결과가 나오자 저쪽에서 재협상을 요구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 절묘한 전략적 판단은 결국 단일화 승리로 이어졌고,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결정적 분수령이 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고인을 향해 "나와 천생연분"이라며 깊은 신뢰를 보냈고, 그를 '책임 총리'로 발탁해 국정 전권을 맡겼습니다.
③ '운명'의 동반자 : 문재인을 정계로 이끌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대화하며 이동하고 있다. 018.11.28
ⓒ 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과정에서도 고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2011년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던 문 전 대통령에게 정계 입문을 강력히 권유한 이가 바로 고인이었습니다. 정치를 멀리하던 문 전 대통령은 그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대 총선 출마를 결심했고, 이는 훗날 대권으로 가는 시작점이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8년 당 대표에 오른 고인은 의원들에게 "문 대통령을 설득해 대선에 나서게 했으니,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무한한 책임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시스템 공천으로 압승을 거두겠다"고 강조했고, 실제 2020년 총선에서 180석이라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④ '멘토' 이해찬 : 이재명 대통령을 지켜낸 든든한 보호막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해찬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마련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 민주당 개표 상황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2024.04.10
ⓒ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대통령에게 고인은 단순한 정치 선배를 넘어 위기 때마다 화살을 막아주는 든든한 보호막이자 '정치적 스승'이었습니다. 2018년 '혜경궁 김씨' 논란으로 당내 친문계가 이 대통령에게 탈당 압박을 가할 때도 그는 "당의 소중한 자산이다"라고 했습니다.

대표 취임 후 이 대통령 출당 요구가 있자 "재판이 진행 중이니 지켜봐야 한다. 정무적 판단을 할 단계가 아니다"라는 말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는 이 대통령의 물적 토대로 이어졌습니다. 고인의 싱크탱크였던 '광장'이 2021년 '민주평화광장'으로 개편돼 이 대통령 지지 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이 '이재명 대세론'의 신호탄이 됐습니다. 당시 친이해찬계 의원들이 대거 합류하며 이 대통령이 '변방의 장수'에서 '당의 주류'로 거듭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현대사의 압축판, 그가 남긴 '민주주의' 과제
 이해찬 전 총리 생애. AI 도구를 활용해 만든 인포그래픽
ⓒ 임병도
이해찬의 정치는 때로 '비타협적'이라거나 '독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은 그의 강한 추진력과 선명한 논리가 상대 진영에는 그만큼 위협적이었음을 방증합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것은 '민주주의의 시스템화'였습니다.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닌, 당과 정부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고인을 향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을 잃었다"고 애도했습니다. 김대중부터 이재명까지, 네 번의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킹메이커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통령 빼고는 다 해봤던 그가 설계한 '민주주의의 강물'이 어디로 흘러갈지, 이제 남겨진 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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